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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푼크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이다...스투디움을 인정하는 것은 사진작가의 의도를 숙명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 의도와 일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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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에 청년 루이스 페인은 미국의 국무장관 W.H.슈어드의 암살을 기도했다. 알렉산더 가드너는 페인을 그의 독방 감옥에서 촬영했다. 그는 자신의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아름답고, 청년도 역시 아름답다. 이것은 스투디움이다. 그러나 푼크툼은 그가 곧 죽는다는 것이다. 내가 동시에 읽는 내용은 그 사실은 존재할 것이고 그것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음이 걸려 있는 전미래를 공포를 느끼며 지켜본다...이러한 푼크툼은 시사성 있는 사진들의 풍부함과 부조화에 가려 다소간 지워져 있지만 역사적 사진에서 생생하게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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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디움’과 ‘푼크툼’. 전자가 ‘나는 좋아한다’와 연결된다면, 후자는 ‘나는 사랑한다’와 연결되면서 둘은 강밀도와 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전자가 사진에서 교양적으로 정보, 재현, 놀라움, 부러움의 감정을 일으킨다면 후자는 나를 정신적으로 찌르고, 상처를 주며, 타박상을 입힌다. 사진에서 감정을 촉발시키는 이런 두 특징적 요소/개념들에 연극과 접근되는 죽음의 직관이 덧붙여진다...결국 푼크툼은 스투디움적인 포르노의 욕망을 넘어선 에로티시즘의 욕망이 위치하는 차원에 자리잡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와 같은 욕망의 차원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펼쳐진 사진론이 결국 피상적이라고 결론짓고 ‘취소의 변’을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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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것은 옴브르단의 흑인들처럼, 중심에서 벗어난 세부 요소이고, 소년의 옷에서 커다란 당통식 칼라이며, 소녀의 손가락에 들린 인형이다. 나는 야만인이고 어린아이-혹은 편집광-이다. 나는 모든 지식, 모든 교양을 몰아내고, 다른 시선을 물려받는 것을 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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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모방들과는 반대로 내가 사진에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점은 사물이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과 과거라는 이중적 위치가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약은 사진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환원을 통해서 그것을 사진의 본질 자체, 노에마라고 간주해야 한다. 내가 사진에서 의도하는 것은(아직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자) 예술도 소통도 아니고, 사진의 토대를 확립하는 질서인 지시 대상이다. 따라서 사진의 노에마라는 명칭은 ‘그것은-존재-했음.’ 혹은 ‘완고한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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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노에마는 단순하고 평범하다. 아무런 깊이도 없으며, “그것은 존재했다”일 뿐이다...사진은 마치 그것이 나타내는 것의 형상을 풍자하는 게 아니라(전혀 그 반대이다), 그것의 존재 자체를 풍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가득 담아내는 정교한 명백함이다...따라서 사진은 나에게 이상한 영매, 새로운 환각 형태이다. 지각의 차원에서는 허위이지만, 시간의 차원에서는 진실한 환각 형태이다...현실의 광적이고 엷게 문질러진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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