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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인간다워져 갔다. 그리고 더욱더 그는 ‘다윗다워져’갔다. ‘거룩한’은 바로 그러한 삶, 즉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점점 더 살아 있는 인간으로 깨어나는 삶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인간다워진다. 다른 길로 가면 점점 더 인간다움과 나 자신다움에서 멀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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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만일 압살롬이 아버지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자신이 다말을 얼마나 아꼈으며 암논이 얼마나 미웠으며 집 떠난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아들을 되찾았을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압살롬을 거절하는 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풍성히 받았던 것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지속적으로 결연하게 거부한 죄였다. 날마다 그는 사랑 베풀기를 거절하는 가운데 완고해져 갔다…압살롬과 가까워지기를 거부할수록 하나님과도 멀어졌다. 아버지답지 못해질수록 점점 더 인간답지 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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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죄인의 자리는 책망과 정죄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자리라는 소식 말이다. 복음의 초점은 고발이 아니라 인정(recognition)과 초대다…다른 어떤 것-밧세바를 즐기는 쾌락이나 우리아를 부리는 권력-보다도 하나님이 더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바로 나다. 내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을 내게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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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만일 나의 죄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나는 저 위대한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무관심할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는 소식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주된 임무는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범한 죄를 인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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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다윗은 앉았다. 이것은 지금껏 다윗이 행한 것 중 가장 중대한 행동이다. 행동하지 않기로 한 행동. 이것은 골리앗을 죽인 것보다도, (그의 적) 사울이 받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존중한 일보다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일보다도 더 중대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껏 기름부음과 훈련과 보호와 권능을 받으며 준비한 왕업에 대한 자격 여부가 바로 지금 그가 나단의 목사적/선지자적 권고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이럴 때 우리에게는 선지자의 간섭이 필요하다. 나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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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다윗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청하는 데 대가였다. 그는 당차고 거침없이 간청했다. 도움, 피난처, 치유, 구원, 구조, 용서, 자비 그리고 성령을 구했다. 그는 찬양하는 데 있어 놀랍도록 견고했다. 그러나 그러한 찬양들은 모두 힘들여 간청하는 기도의 삶에서 캐내어진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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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기적으로 발달한다…신앙 생활이란, 우리의 근육과 뇌 세포, 감정과 심기, 유전 정보와 작업 일정, 우리 나라 기후와 우리의 가족사라는 실제 현실의 토양에 심겨진 씨앗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전인격적으로 되어 가는 무언가다…다윗 이야기…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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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대부분의 다른 성경 이야기들처럼, 다윗 이야기 역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공된 이상(ideal)이 아니라, 인간됨이 형성되는 장인 있는 모습 그대로의 실재(actuality)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현세/인간의 상황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윗 이야기 속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인간 상상력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기까지, 인간됨의 영역 전체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실재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이다…인간 다윗으로만 볼 때 그는 별로 대단하지 않다…하지만 다윗이 중요한 것은, 그의 도덕성이나 탁월한 전투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그의 체험과 증언 때문이다. 그의 전 생애는 하나님과의 대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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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체내 아드레날린 수치를 마구 증가시켜 놓은 화요일의 사업 거래,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것을 알게 된 수요일의 혐오감, 금요일 오후의 지루한 권태.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들을 재료로 삼아 구원 사역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차적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말이다. 물론 예배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우리의 영성, 즉 성령님이 우리 안에 형성해 가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성장시키고 실천할 일차적 장소는 예배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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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아멜렉은 종교 규정을 접어 두고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주었다. 아히멜렉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소가 침범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어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종교 규정의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을 간파할 줄 알았던 그는 다윗에게 빵을 내어 주었다. 엄숙한 종교 의식을 위해 구별된 빵, 지금 우리의 성찬식 빵과 닮은 그것을 다윗은 낚아채듯 받아들고 굶주린 거지처럼 게걸스럽게 입에 넣었다. 천여 년 후,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율법의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정신을 따른 아히멜렉을 넌지시 칭찬하셨다(마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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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광야에 있을 때에는 해야 할 임무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으며 그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다. 그저 깨어 있고 그저 살아 있으면 된다. 그것이 전부다. 광야에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삶이 단순해지고 깊어지는 것을 체험한다…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광야 생활에 익숙해질 수 없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매우 자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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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그의 삶의 모양과 방향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이지 결코 나발의 악한 바보 짓거리가 아니다…아비가일의 말은 사실 이런 뜻이다. “다윗이여, 원수를 갚는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광야는 당신이 스스로를 시험해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인하고 꼿꼿한지 알아보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광야는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어리석은 자가 되렵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로 족합니다.”…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다윗을 놀라게 하며 갑작스럽게 빠져 들어갔던 추함에서 그를 구해 내었고,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보고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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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다윗은 사울의 오랜 적대감에도 비참해지지 않았으며, 블레셋에 대한 과도한 악감정 속에 갇히지 않았고, 이득에만 집착하는 인간으로 전락하지도 않았으며, 과거 업적의 명성을 우려 먹고 사는 나태에 빠지지도 않았고, 애정 때문에 탈선하지도 않았다…그 모든 미움과 사랑은 거룩한 삶으로 변형되었다. 즉 하나님 안에, 기도 안에, 순종 안에 확고히 자리잡은 삶으로 변해 간 것이다. 그의 걸음걸이는 더 커졌다. 그의 포용력은 더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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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히브리인들은 역사에 붙박아 사는(historical) 백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고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하나님은 언제나 계속해서 사람들의 삶에 쓰이는 물질(돌과 도기와 나무)을 재료로 삼아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독교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것이 성례전이다. 성례전은 평범한 물질을 재료로 삼아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물질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 삶의 일상(물과 빵과 포도주) 속으로 들어오셔서, 바로 거기서 구원과 성화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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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법궤는 결코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고, 레위인들이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서 운반해야 했다. 웃사는 이러한 모세의 지시를 따를지 않았고(무시했고) 대신 블레셋식 최신 혁신 기술-황소가 끄는 수레(삼상 6장을 보라)-을 이용했다…효과적인 기계를 사용…비인격적인 수단을 사용…이를테면 웃사는, 거룩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효과적 방법론을 받아 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수호 성인 격이다…웃사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위험 표지판이다. “하나님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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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다윗은 우리가 본받고 싶은 사람이 못 된다. 다윗과 함께 있으면, 다윗만큼 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열등감을 느끼게 될 일은 없다…다윗은 우리처럼 혹은 우리보다 더 나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는 사람, 결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는 않는 사람이다. 다윗의 삶은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삶이다. 우리는 도덕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적 삶에 대한 감각을 깊게 하기 위-’아하,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구나.’-상상력을 통해 다윗 이야기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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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놉에서 일어났던 일에 비추어 내 삶을 바라볼 때, 나는 성소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과 관계가 깊어지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곳은 또한 다윗처럼 빵과 칼을 얻는 곳, 든든한 양식과 전투용 무기를 얻는 곳이기도 하다. 빵과 칼, 이 두 단어 모두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맞설 수 있는 힘을 얻고 무장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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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몇 년 전 나는 다윗 이야기에는 단 한 번의 기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굉장히 놀랐던 적이 있다. 단 한 번도 기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 이야기 플롯의 중심부에 계시며 그 모든 세세한 사건 속에 언제나(비록 대개 침묵하고 숨어 계시지만)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결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을 그냥 우회해 지나쳐 가지 않는다. 이야기 내부에서 조용하고 꾸준하게 숨어서 작용하는 소재는 바로 다윗의 인간됨이다…예수님이 목수로 일하실 때 구부러진 못을 펴는 데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육신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것을 받아들이시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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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광야 자체는 무대에 불과하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광야에 있었다. 사울은 오로지 다윗을 잡을 생각에 다윗을 쫓아 달려갔고 살인만을 생각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 달려가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기도를 하며, 경이로움에 눈을 크게 뜨고, 그 영광을 받아들이며, 한결같은 사랑과 ‘약속을 지키시는 진실의’ 하나님에 대해 알고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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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아마 그들은 사울의 적대감이 다윗 집안 전체에까지 미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 같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비록 다윗이 여전히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와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함께 당하는 고통을 통해 그들 사이에 전에 없던 형제애가 생겨났을 것이다. 전에는 서로 맞지 않는 형제들이었으나, 고통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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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광야 영성은 우리가 보통 때라면 결코 사귀려고 하지 않았을 사람들(그리고 보통 때라면 우리 같은 사람과 사귀려고 하지 않았을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일을 포함한다. 이들은 대개 근사한 사람들이 못 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 다윗이 그랬다. 예수님도 그랬다. 바울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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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브솔 시내…이제 뒤에 남겨졌던 그들 200명은 벌떡 일어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 껴안고 입맞추며, 비록 자기들이 힘을 보태진 못했지만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그 400명 중에는 인색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나약한 동료들과 전리품을 나누어 갖자는 말에 불끈 반발했다…바로 그때 다윗이 나섰다. 그의 이러한 개입이 바로 이 이야기의 절정이다…”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한다”…이처럼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것은 순전히 은혜였다…그러므로 그들 역시 서로를 놀랍도록 관대한 은혜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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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흩어져 살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다윗과 같은 구체적인 자비의 실천을 통해 모두가 서로 완전히 결합되어 그 어떤 전문가도 우리를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말이다. 브솔 시내의 다윗은 예수님을 예기한다. “지쳤느냐? 힘이 없느냐? 종교에 대해 탈진했느냐? 나에게 오라. 그러면 생명을 회복하리라. 나는 너희에게 진정한 쉼을 보여 주겠다. 나와 함께 행하고 나와 함께 일하라…나와 교제하라. 그러면 너희는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삶을 배울 것이다”(마11:28-30,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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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복음을 기록하는 데 써야 할 잉크를 왜 아브넬과 요압 같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낭비한단 말인가? 왜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것일까?…하나님은 바로 그런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기로 하신 것이다. 아브넬과 요압 역시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이들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빨리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우리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아브넬과 요압을 만나기도 한다…근본적으로 그들은 다윗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어떤 방법으로 일을 하느냐는 중대한 문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해야 한다. 이기적 이용(아브넬)이나 폭력(요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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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많은 사람들이 성경 읽기를 그만둔거나 거부한다. “나는 성경을 못 읽겠어. 특히 구약 말이야. 싸움하는 이야기, 잔인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러나 사실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접하는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그 비열함과 기회주의와 종교적 폭력과 종교적 선전 조작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를 너무도 힘들게 만드는 많고 많은 스루야의 아들들의 세계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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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다윗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 아는 차원을 넘어 실제 하나님을 경험한다. 즉 뛰어들고 껴안고 받아들인다…그의 일상 자체를 재료로 삼아 구원을 이루시는 친밀한 임재이시다. 그의 하나님 경험은 그에게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성숙을 가져온다. 베들레헴의 목동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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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다윗처럼 기도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은 늘 그것을 경험한다. 깊은 슬픔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찬양이 솟구쳐 올라오는 일 말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 갇힌 채 기도하고 있다. 한 줄기 빛도 없이 여러 날, 여러 주, 여러 달 동안.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이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탁 트인 곳에 있음을 발견한다…아무 말도 들리지 않기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알고 보니 고요한 가운데 은밀히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이러한 부활은 수없이 일어난다…우리의 기도와 삶 속에 말없이 숨어 있는 이러한 선회축들이야말로 바로 부활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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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전에 다윗은 므비보셋을 고발하는 시바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이제 므비보셋의 이야기도 듣게 된 그로서는 두 이야기 중 하나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뜻밖의 반응을 만나게 된다. 다윗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따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반대 신문도 하지 않았고 증인을 불러 오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두 사람 모두를 자신의 도시와 집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그의 사랑은 배신과 무책임, 거짓말과 위선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었던 것이다…복음의 예기(anticipation)다…관대한 사랑의 언약을 지키는 일에 자신의 힘을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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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어린 시절 내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다윗이 되었다…지금도 여전히 나는 다윗이다…”비록 보잘것없고 양이나 지키는 무명의 신세지만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성경 이야기꾼의 의도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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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성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일거리를 받는다는 의미다. 즉 고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이런 말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을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너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기름부음은 우리의 일을 하나님의 일과 연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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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다윗이 왕으로서 한 첫 번째 일은 나쁜 왕을 섬기는 일이었다…다윗에게, 종으로서 섬기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왕으로 통치하는 일이었다. 그는 종인 동시에 왕이었다. 사울의 궁정에서 다윗은 왕을 섬기는 왕이었던 셈이다…모든 진정한 일에는 섬김과 통치라는 두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모든 선한 일은 참된 주권적 통치의 발현이다. 그리고 그 주권을 가장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섬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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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악은 선을 이길 수 없다. 박해는 충성심 앞에 무력하다. 적의 위협은 우정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현재 우리들의 사고 방식이 아니다. 정치적인 면에서나 심리적인 면에서 우리는 이와 전혀 다른 생각에 입각해 움직이며, 따라서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 엄청난 양의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드넓고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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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공동체다. 나는 다른 이야기들과 더불어 나의 이야기를 배운다. 각각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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