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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루이스의 [시편 사색]...모든 기쁨은 자연스럽게 찬양으로 흘러넘친다는 사실...알고 보면 세상은 온통 찬양소리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찬양하는 소리, 좋아하는 시인을 찬양하는 소리, 여행지의 풍경을 찬양하는 소리, 좋아하는 게임을 찬양하는 소리부터 날씨, 포도주, 음식, 배우...사람들은 자기가 높이 평가하는 대상을 찬양할 때는 자발적으로 찬양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그 찬양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는 점이다. “그녀 정말 사랑스럽지 않아요? 그것 정말 영광스럽지 않나요? 그거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죠?” 모든 이들에게 찬양할 것을 권하는 시편 기자들의 행동도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의 행동과 똑같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 내가 가졌던 문제는, 이렇듯 다른 모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기쁘게 하는, 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어리석게도 하나님이라는 최상의 가치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거부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찬양하기 좋아하는 까닭은, 찬양이 단순히 우리의 즐거움을 표현해 줄 뿐 아니라 완성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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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희락주의는 다음의 다섯 가지 확신들 위에 세워진 삶의 철학이다. 1)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은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며 선한 것이지 죄가 아니다. 2) 우리는 그것이 나쁜 충동이라도 된 듯이 행복해지려는 갈망을 부정하거나 저항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이 갈망을 더욱 강화하려고 하고 더 깊고 더 오래도록 지속되는 만족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으로 이 갈망을 키워야 한다. 3) 가장 깊고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from)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in) 있다. 4)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행복은 그 행복을 다양한 사랑의 방식으로 이웃과 나눌 때 완성된다. 5) 우리 자신의 기쁨 추구를 포기하는 한 그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못하게 된다. 이것을 좀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기쁨의 추구는 모든 경배와 미덕의 필수 요소다. 즉,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by)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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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성의 복잡성은 마치 두 렌즈로 세상을 보실 수 있는 능력과 같은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하였다. 즉 그분은 협각렌즈로나 광각렌즈로 세상을 보실 수 있다. 협각렌즈로 고통스럽고 불의한 일을 보실 때, 하나님은 죄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는 분노하시고 슬퍼하신다...하지만 광각렌즈로 고통스럽고 불의한 일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은 죄의 참상을 그 참상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과 그 참상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결과와 관련지으면서 보신다. 즉 하나님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어떤 패턴, 즉 모자이크를 형성하는 모든 연관 관계들과 영향들을 고려하면서 보신다. 이 모자이크는 선한 부분이든 악한 부분이든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하나님은 영원부터 계획하셨고, 모든 사건을 가지고 조금도 실수 없이 장엄한 구속사의 모자이크를 만들고 계신다. 이 모자이크(밝은 타일과 어두운 조각 모두)를 생각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해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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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그분이 구속하신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완성된다. 하나님의 행복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절정에 이른다. 이 찬양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의 완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찬양을 추구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똑같다. 이는 위대한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희락주의의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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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좋은 선물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갈망한다. 그분을 뵈어 알고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영혼이 갈망하는 궁극적인 향연이다. 그 이상 추구할 것이 없다...마음을 담아 예배한다는 것은 생기 넘치는 느낌과 감정과 애정으로 예배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향해 아무 느낌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다...마음의 감정을 가리키는 외적인 행동은 있지만 그런 마음의 감정은 없는 것, 즉 ‘외식’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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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다...1974년 어느 날...”조니, 밥일세. 나쁜 소식이네...장인장모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네. 장모님은 가망이 없으시고 장인은 중상이네.”...방으로 걸어가면서 “내가 앞으로 30분 동안 운다면, 어떤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의 의식적인 동기에 관한 한 슬픔의 감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슬픔은 자동적으로 찾아온다.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 수행하지 않는다. 의식적인 의지를 발휘하지도 않는다. 각오할 일도 아니다. 의식적인 의지로, 그 안 깊은 곳에서부터 감정은 흘러나온다...내 마음에서 터지듯 솟구쳐 오르는 감정만 거기 있을 뿐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모든 진정한 감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의식적으로 생기게 하지 않는다...하나님을 향한 감정이 목적 자체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진정한 예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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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게도냐 성도들은 얼마 안 되는 자신들의 소유를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내어줄 기회를 달라고 구하였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3-4).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기쁨이 베풂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들은 베풀기를 원했다. 그것이 그들의 기쁨이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고려하고 또 사랑의 외적 행위에 수반되어야 하는 감정도 포함한 사랑의 정의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으로 이웃의 필요를 즐거이 채우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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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뮬러...’그럼 속사람을 위한 음식은 무엇인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단지 성경을 읽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물이 파이프를 지나가듯 단지 성경이 우리 마음을 통과하는 데 그칠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상고하고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하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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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과 그에게 많이 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기도 생활의 실패는 대개 그를 아는 일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슈퍼맨이 자기 차에 탄 줄도 모른 채 움푹 팬 길에 빠진 차를 빼려고 혼자서 안간힘을 쓰는 운전자와 같다. “네가 알았다면 구했을 것이다.” 기도 없는 그리스도인은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유명백화점 상품권으로 자기방을 도배하고 자기가 가진 적은 돈으로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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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그것은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주님의 온전하심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그 주님께 도움과 충고를 간구하고 그분께 소망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시33:20-22;사8:17). 이스라엘은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는다”(시106:13)고 책망을 받는다. 왜 그런가? 그들이 하나님을 구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악한 것은 우리가 긍휼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높이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일하심으로써 스스로를 높이시려는 분이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활동이다. 즉, 우리의 무기력함과 그분의 권능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그분의 충고를 구하는 일이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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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사탄은 박해 중에 당하는 우리의 고난을 향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도 바로 그 고난에 대해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신다...질병도 마찬가지다...고린도후서12장7-10절...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육신적인 고난을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고난의 의도는 “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에게는 그런 계획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파괴적인 목적을 무력화하심으로써 주권적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려는 자신의 사랑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사탄은 늘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약함 중에 도리어 자신의 능력을 더 크게 나타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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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고난을 통해서 기쁨을 추구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기쁨의 원천이 되시는 분의 가치를 칭송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고통의 터널 끝에 빛으로 비추어 주신다...하나님이 유익이시다...인간이 사는 가장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최고로 만족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고난 중에 더 사실이다...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때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것이고 믿음의 기쁨 안에서 그분의 은혜를 칭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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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에드워즈는, 이 말씀에 따르면 성도의 영혼 속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날 때 “참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거(”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과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이 두 가지 일은 사랑이지, 단지 결단만은 아니다. 참된 기독교에 대해 말하면서 에드워즈는, 거듭남은 실제로 새로운 사랑을 가진 새로운 본성을 낳는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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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우리는 영웅들처럼 우리 자신의 자원을 모을 필요가 없다. 그보다 우리는 아버지의 힘을 신뢰하고 보상의 기쁨을 바라는 어린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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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믿음의 진리에 관해 대화할 때마다, 비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증명을 요구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비그리스도인의 인생철학을 증명해 달라고 진지하게 요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은 잠정적이고 불확실한 반면 세속적인 세계관은 좀 더 안전하고 확실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철학적, 역사적 설명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 그릇된 인상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사람들은 세속적 회의주의의 주장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장이 널리 퍼졌다는 이유로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논쟁을 하려면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증거를 제시하면 비그리스도인들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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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
사탄은 하나님의 승인 없이는 활동할 수 없다...사탄은 실제하면서 우리의 재난에 관여하지만, 그것은 최종적인 개입도 아니고 결정적인 개입도 아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는 욥의 모든 고난 중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한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목적)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따라서 사탄이 개입했을 수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이었으며, 그것은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목적이었다...고린도후서 12장 7절...겸손은 고난을 통해 의도한 사탄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적은 하나님의 것이다. 즉, 사탄은 바울의 삶에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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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죄로 보지 않았다. 그건 단지 인간의 본성으로 부여받은 것일 뿐이다. 중력이 자연의 법칙이듯이 행복 추구는 인간 마음의 법칙이다...우리의 실수는 기쁨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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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시거나 기쁨의 대상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경배를 받지 않으신다. 찬양은 기쁨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그분께 영광을 드리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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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최종 전 단계이지 최종 단계가 아니다. 구속과 구원과 회복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은 좀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일하신다.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누리는 즐거움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다. 기독교 희락주의의 근본 토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충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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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은 영원토록 자기 자신의 최우선 애정 대상이셨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아들을 낳으시고 사랑하셨기에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속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교제 속에서 영원한 기쁨, 최고의 기쁨을 누려오셨다...하나님은 자신의 사역 안에 반영된 자기 영광을 보는 것을 즐겨하신다. 그 때문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행복이 창조와 구속 사역에서 흘러넘친 것이다...그의 모든 사역은 당신의 탁월함으로 인한 무한한 풍성함의 부산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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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과 방법이지 장소가 아니다. 예배는 살아있고 참된 마음으로 드려야 하며,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에 기초해야 한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성령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단어 영과 진리는 예배의 방법과 대상을 가리킨다...예배는 반드시 마음과 정신을 다해 드려야 한다. 감정과 생각을 모두 사용하여 예배해야 한다...참 예배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들과 깊고 건전한 교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뿌리박은 강한 애정이 성경적 예배의 뼈와 골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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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예배에서 강한 감정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신앙만큼 우리의 성향(inclination)이 활발하게 활동해야 하는 것은 없으며, 신앙만큼 미지근할 때 가증한 것도 없다.’...마음(heart)에는 열기가, 지성(mind)에는 빛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빛에 의해 정당성이 확보된 열기여야 한다!...성경의 진리로 형성되고 그것에 뿌리를 내린 하나님을 향한 강한 감정, 바로 이것이 성경적 예배의 뼈와 골수다...예배의 형식은 두 가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이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그 진리의 아름다움에 반응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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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그(바울)는 이웃의 덕을 세우는 기쁨을 추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 기쁨 때문에 타인의 유익에 무관심하고 사적인 쾌락에만 매인 데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된 기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구원과 덕 세움으로써 타인의 선을 이루는 데서 얻는 기쁨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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