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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에는 어떤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사람들의 사상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거기에 원천을 두고 있다. 사람은 마음의 내면 생활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즉 그들의 사상 세계가 그들의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사람들은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인식하는 것보다도 더 일관성 있게 이 전제들에 따라서 살아간다. 전제라는 말은 개인이 삶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방식, 개인의 기본적인 세계관,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뜻한다. 어떤 사람의 전제는 그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에 근거한다. 사람들의 전제들은 그들이 외부 세계에 내놓는 모든 것에 어떤 틀을 제공한다. 그 전제는 또한 그들의 가치들을 떠받치는 기초가 되며, 그러므로 그들의 결정의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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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과 가치 체계 그리고 문화도 자기 자신의 제한성과 유한성보다 더 강력한 것을 기초로 갖지 못하면 이와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삶과 가치 체계 그리고 문화는 압력이 그다지 크지 않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압박이 심해지는데도 충분히 강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마치 로마의 어떤 다리가 오늘날의 6륜 트럭의 무게에 눌려 무너지는 것처럼 붕괴될 것이다. 사람들의 문화와 자유는 쉽게 파괴된다. 충분한 기반이 없는데 압력을 받는다면, 붕괴는 오직 시간 문제이다. 그리고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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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그 방은 인본주의 사상이 분명하게 표현되도록 꾸며졌다. 자신을 바위에서 떼어 내고 있는 이 인물들을 지나면 마침내 방의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있는 찬란한 [다비드] 입상에 이르게 된다...그러나 이 다비드는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 다윗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비드는 단지 조각상의 제목이었을 따름이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유대교도라는 것과 유대교 문화를 알고 있었지만, 입상의 인물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이 인물을 성경의 다윗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인본주의적 이상 곧 인간은 위대하다는 표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다비드]는 인본주의적 인물이 그 자신을 미래의 인간으로 보았음을 선언한 것이었다!...어울리지 않게 큰 손의 크기까지도 인간이 강력한 존재임을 말한다...인본주의는 자신만만한 자신 속에 서 있었고, [다비드]는 바로 그 표상이었다. 그러나 생애 말년에 미켈란젤로가 인본주의가 충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흔적이 있다...말년에 조각한 피렌체 대성당의 피에타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의 피에타는 이와 대조를 이룬다. 피렌체 대성당의 피에타에서는 니고데모 혹은 아리마대사람 요셉을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로 형상화하였다. 이 피에타들을 살펴보면 인본주의적 자신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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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에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핵심적인 차이를 지적했다...그는 자유가 북부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남부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에 의해서 도입되었다고 주장했다. 남부에서는 자유가 방종으로 흘렀지만, 북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삶의 개별자들에게 의미를 가져다줄 방법을 찾지 못했으며 도덕에서 절대자를 얻을 곳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자유를 누렸고, 동시에 설득력 있는 절대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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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복음의 가르침은 예술과 정치적 활동에서 이차적인 결과들을 낳는다...개인은 성경에 기록된 절대 기준에 근거한 합의가 있기에 자유를 가졌고, 따라서 자유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는 참된 가치를 갖게 되었다. 이전에 세상은 이런 일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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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새뮤얼 러더퍼드...[법이 곧 왕이다]...어떤 형식이 있으므로 무질서하지 않은 자유라는 개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최고 권위인 성경이 기초로서 서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자의적인 결정에 의한 정치가 아닌 법에 의한 정치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공의회 운동과 초기 중세의 의회를 넘어서는 것이다...그의 작품과 그 작품이 나타낸 전통은 미합중국 헌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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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과학의 등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대립하지 않았다. 사실상 결정적인 점에서 과학 혁명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근거했다...화이트헤드...’인격적 존재의 지적 합리성’...이 강좌에서 그는 하나님의 합리성 때문에 초창기 과학자들은 어떤 난공불락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신념은 모든 세세한 사건이 일반 원칙을 따라 아주 일정한 방식으로 그 선행 사건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념 없이는 과학자들의 믿기 어려운 작업이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초창기 과학자들은 세계가 이성적인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성의 기초 위에서 자연과 우주에 관하여 참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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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역사적 흐름은 다음과 같다. 루소, 칸트, 헤겔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이래로 철학자들은 지식의 통일성과 삶의 통일성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고서 실재에 대한 파편화된 개념을 제시했다...일시적으로 이들 미술가들은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랐듯이 철학자들을 뒤따랐다...철학자들이 먼저 지적으로 표현한 것을 후에 미술가들이 미술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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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무감각은 후기 제국(로마)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무감각이 드러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는 예술에서 나타난 창조력의 결핍이었다...4세기의 작품이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이래로 기념물에 사용되었던 2세기의 조각물에 비해 초라하다...엘리트들은 사회 생활을 지적으로 탐구하는 일을 포기했다.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던 예술은 퇴폐적이었고, 음악은 점차 과장되었다. 심지어 동전의 초상화들까지 저질이 되었다. 모든 삶에는 무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노동이 더 이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국가 권력이 점차 노동을 관장하게 되었고, 자유는 사라졌다...로마는 야만족의 침입과 같은 외적인 힘 때문에 몰락한 것이 아니다. 로마의 몰락은 내적으로 견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며, 야만족은 다만 그 붕괴를 완결지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로마는 점차로 폐허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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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중세는 이 이교 문화의 유산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바울은 그렇게 구애받지 않았따.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면, 그는 위대한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로 있으면서 갈고 닦은 섬세한 랍비적 추론 방법을 사용했듯이 어떤 때에는 그리스의 저자들도 인용했다...그러나 어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이 타협하지 않고 비기독교적 학문을 다룰 수 있었다 해도, 차츰차츰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교회의 선포의 권위에 더더욱 입각했던 신앙의 허점 속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 형태가 파고들어 가기란 아주 수월했을 것이다. 13세기의 위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를 존중하여 계시와 인간 이성을 동등한 자리에 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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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아퀴나스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타락했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그의 타락관은 불완전하다. 그는 인간 전체가 아닌 부분에만 타락의 영향이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의지는 타락 혹은 부패했지만, 지성은 손상받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적 지혜를 의지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성경의 가르침과 비기독교 철학자의 가르침을 자유로이 혼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점을 강조한 결과로 철학은 점차로 계시 곧 성경에서 나누어졌고, 철학자들은 더욱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특히 의존했다...플라톤...절대자 혹은 이념을 가리킨 것을 의미...아리스토텔레스는...개별자를 강조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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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단테는 조토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그의 저술은 깊이 있고 심오한 아름다움을 지닌 뛰어난 천재적 작품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요소가 발전하는 과정에 서 있던 단테는 작품 전반에서 암암리에 기독교 세계와 고전적 이교 세계를 혼합함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잘못된 측면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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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많은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이 마음에 품고 있던 인간의 자율성은 전적으로 비기독교적 그리스 로마 세계에 의존한 것이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그래서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현대 인본주의, 즉 인간은 그 자신의 척도이며 인간은 자율적이며 전적으로 독립적이라는 신념에 뿌리내리고 있는 신념 체계를 향하여 꾸준히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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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개별자를 강조하는 반면 신플라톤 사상은 보편자를 강조했다. 초창기 르네상스인들은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혼합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그 후에 르네상스인들은 기독교와 플라톤 사상을 혼합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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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종교 개혁자들은 르네상스로 인해서 생겨난 새로운 지식과 태도에서 도움을 얻었다...그러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전통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종교 개혁자들은 오직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경과 초대 교회의 순수한 기독교로 돌아갔다...종교 개혁의 핵심적 활동은 교회에 들어온 인본주의적 왜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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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성경적 가르침과 이교 사상의 혼합이 심해졌다. 이 혼합은 말만 빌려 온 것이 아니라 실제 내용까지 빌려 온 것이다...미켈란젤로는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성경의 가르침과 비기독교적 이교 사상을 결합시켜 그림을 그렸고, 이교 여선지자들을 구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하게 여겼다. 똑같은 혼합이 단테의 저술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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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성경이 인간에 대하여 참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점이다...여기서 인간이 중심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 인본주의가 결국은 사람들에게 참된 의미를 주지 못했다는 점은 뜻밖의 사실이다. 반면,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성경의 입장에서 출발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기반이 있게 된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그들은 프로그램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각자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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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렘브란트...[십자가를 올림]...그림을 보면 푸른 화가 베레모를 쓴 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올리고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렘브란트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화상이었다. 그는 그렇게 그의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말했던 것이다...렘브란트는 그리스도꼐서 모든 생활의 주되심을 알았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세계 가운데 살았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세계와 그 형태를 자신의 그림에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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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만일 산업화와 더불어 축적된 부를 자비롭게 사용할 것과 인간 각자는 모두 존엄하다는 점을 강력하게 강조했더라면, 산업 혁명은 실로 선을 추구하는 혁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교회는 재물을 자비롭게 사용할 것을 강조하는 신구약 말씀에 대하여 너무나 자주 침묵했다. 개인적인 구제 활동으로 이 침묵의 죄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에 뒤따른, 축적된 재물을 자비심 없이 사용하는 현상은 특히 두드러졌다...이러한 견해를 기독교가 합의해서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교회들은 이런 오용들에 반대하여 충분히 소리를 높이지 않았던 사실을 비판받아야 한다. 그 교회들이 분명하고 용기 있게 외쳤더라면, 당시의 상황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가 분명하고 용기 있게 이들 논제에 대하여 외쳐야 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성경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윌리엄 윌버포스...결국 노예 무역은 1807년 영국에서 금지되었고, 윌버포스가 죽기 전에 노예 제도 자체가 그곳에서 소멸되었다...미국 개혁 장로 교회가 일찍이 1800년에 교단 차원에서 노예 소유자는 성찬에 계속 참여할 수 없다고 선포했고, 그 이후로 노예 소유자는 아무도 참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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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로마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를 공격했을 때, 이는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이 성경과 다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교회 당국은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가 교회 정통 교리의 일부가 되었고 갈릴레이의 견해는 이들 요소와 분명하게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실상,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와 성경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변호했고 이 점이 바로 그가 재판받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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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세계가 이성적인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생각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활동하며 관찰과 실험으로 세계에 관하여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 점이 그들의 인식론적 기반, 즉 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한 철학적 기반이었다...이 기초 없이는 서구 근대 과학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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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실재가 꿈이 되어 가자 미술 운동으로서의 인상파는 분열하였다. 인상파와 더불어 미술이 현대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 시작했다...우리는 미술이 현대의 진리와 삶의 파편화라는 견해를 나르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문화 속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또한 강조해야 한다. 철학이 통일성에서 파편화로 옮겨 갔을 때, 이 파편화는 또한 그림에서도 나타났다. 후기 인상파 그림에 나타난 파편화는 철학에서 나타난 지식의 통일성에 대한 실망과 같은 것이었다. 그 파편화는 그림의 새로운 기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관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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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파블로 피카소는 세잔의 파편화를 고갱의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개념에 결합시켰고 막 파리에서 유행했던 아프리카 가면의 형태를 덧붙였다. 이런 혼합된 방식으로 그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렸다. 현재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현대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위대한 미술에서는 그 기법이 제시된 세계관과 일치하는데, 이 파편화라는 새 기법은 현대인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이 기법은 파편화된 세계와 파편화된 인간의 개념을 잘 표현했다...그것은 인간의 인본주의적 희망 위에 세워졌던 르네상스의 예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었다. [아비뇽의 여인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람 이하로 표현되었다. 즉 인간성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피카소가 실제로는 이런 상실과 더불어 살 수 없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올가, 그리고 후에 자클린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일관성 있게 그들을 파편화된 방식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모든 재능을 발휘하여 그들을 모든 인간성을 지닌 사람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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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우연과 존재하는 것의 파편화된 개념은 모든 사물의 몰가치와 부조리에 도달했다. 사람에게 남은 것은 모든 부분이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파편화된 견해였다. 뒤샹은 모든 사물의 부조리는 예술 자체의 부조리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예술 자체는 부조리하다고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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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베리만...1963년 그는 [침묵]을 감독했다. 그는 녹화 인터뷰에서 신은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우주에는 오직 침묵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만일 사람들이 오직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말씀하고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없는 그런 우주에 실제로 살고 있다면, 실재와 공상이나 환상의 차이를 확신할 수 있는 최종적인 방법을 갖지 못한다...계시, 즉 성경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를 두면, 우주에는 궁극적 침묵이 없고 인간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 그리고 환상과 공상을 구별할 수 있는 범주의 확실성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왜 인간인지 그 이유도 있게 된다. 그러나 인본주의적 입장에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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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의 긍정적 측면은 예술에서 곧 감지된다. 조토 디 본도네 이전에 피렌체의 미술은 단조롭고 깊이가 없으며 비잔틴 예술의 약간 덜 세련된 형태였다...500년 세월 동안 피렌체 예술은 참된 변화를 전혀 겪지 않았다. 치마부에의 제자였던 조토 디 본도네와 더불어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조토는 자연에 적당한 위치를 줌으로써 한 걸음을 크게 내디뎠다. 이는 바람직한 일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으므로 자연은 실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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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그들은 감각적인 사랑에는 순간적인 육체적 반응을 넘어서서 진정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정신적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통일적으로 유지하지 않고, 이것을 일종의 상층부와 하층부로 양분했다. 소설가와 시인들의 감각적인 사랑은 하층부에 속하고, 서정 시인들의 이상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은 상층부에 속했다. 이런 상황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을 낳을 따름이었다. 아내는 가정부였고, 반면 이상화된 여인은 몸 없는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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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헨트의 신트바프 대성당에 소장된 [어린양 경배]만 살펴보자...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림의 중심 주제이다. 즉 가난한 자, 부자, 즉 모든 계급과 배경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림에서 이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반 에이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도덕적 죄책을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성경적 교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는 이제 살아 계신다. 그는 대속의 희생 제물로 죽으셨던 것을 상징하면서, 제단 위에 살아서 서 계신다. 이제 그분은 진정 살아 계신다! 반 에이크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는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8)라고 말씀하신 것을 마음속에 확실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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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마리아는 실재 인물로 그려졌는데, 이 점은 이전 시대의 표현보다 일보 전진한 것이었다. 성경이 마리아는 실재하는 한 처녀였고 그 아기 예수도 실재하는 한 아기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왕의 정부가 전혀 거룩함이 없는 마리아로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 역시 파괴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종교적 측면만이 위협받았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점차로 그 위협은 모든 지식과 모든 생활에 퍼져 가고 있었다. 모든 개체 사물 혹은 모든 개별자들에게서 모든 의미가 제거되었다. 사람들은 사물을 자율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연결시켜 주고 그것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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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우리는 두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남부 유럽에서는 절정기의 르네상스가 인간은 만물의 중심이고 자율적이라는 인본주의적 이상에 대부분 기초를 두고 있었고, 둘째로, 북부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그 반대의 해답을 주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 개혁은 절정기의 르네상스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에 루터와 더불어 막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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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종교 개혁이 성경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갔을 때 두 가지 유익을 한꺼번에 얻었다. 즉 거기에는 개별자 대 보편자(또는 의미)의 문제가 없었고, 동시에 과학과 예술이 해방되어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에 기초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의 기독교는 그 당시에도 있었고 그 이래로도 있어 온 인본주의의 기본적 연약함과 궁극적 빈곤함과는 달리 부요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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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만일 루터가 없었다면 바흐는 없었을 것이다...바흐는 의식적으로 자기 음악의 형식과 언어를 모두 성경의 진리에 연결시켰다. 성경적 맥락에서 음악과 언어가 풍성하게 구성되고 다양함이 통일을 이루었다. 이 점은 성경이 보편자와 개별자에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개별자들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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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인본주의자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것, 즉 비인격적 우주는 옳고 그름, 잔인함과 잔인하지 않음에 대하여 중립적이며 침묵한다. 인본주의는 절대 기준을 제공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인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로, 인본주의는 개인 도덕과 정치 생활에 있어서 자의적인 것에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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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공산주의자들에게 법률은 언제나 역사의 진행으로 생겨나는 변화무쌍한 역사적 상황에만 근거를 두고 있을 따름이었다. 성경적 기반에서는 절대 기준들이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인종 차별과 사회 불의를 포함하여 어떤 것이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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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17세기 과학자들은 ‘이유’(why)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고 ‘방법’(how)에만 매달렸다고들 한다. 이 점은 사실이 아니다. 뉴턴에게는 다른 초창기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유에 대한 문제가 없었는데, 이는 그가 우주를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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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구 문화의 사람들은 거의 획일적인 합의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성은 비관론에 이르고 모든 낙관론은 비이성의 영역에 있다는) 기본적 이분법이 우리를 도처에서 감싸고 있고 거의 모든 방향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 관점을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은 다양한 분야 중에서도 철학인데, 여기에 대하여 이미 길게 설명했다. 그 다음에 이 관점은 미술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음악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일반적인 문화를 통해서, 마지막으로는 신학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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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의 경우가 아마도 음악의 이런 변화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케이지는 우주가 우연의 우주라고 믿고서 이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연적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이것을 아주 일관성 있게 수행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그는 때때로 동전을 던져 음악의 내용을 결정했다...그의 어떤 음악은 오직 침묵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런 우연적인 방법을 쓰자 그 결과는 날카로운 소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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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개별자에게 의미와 가치를 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실증주의가 사라지면서 인본주의는 인식의 확실성을 보장할 아무런 기반도 갖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술가들이 철학자나 과학자들보다 먼저 이 문제를 발견했다는 점인데, 실증주의는 인상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기독교적 기반 없이는 예술가나 철학자나 과학자나 모두,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음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요구하는 무게를 지탱할 만한 기반을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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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실존주의와 언어 분석은 둘 다 중요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철학이다. 두 철학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해결책을 주지 않을 뿐더러 각각 제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혼란을 빚고 있다. 물론 영향력이 작은 다른 철학들이 있지만 그것들도 그 이상의 뚜렷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형식 철학은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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