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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그분(예수님)이 노예해방 단체를 조직하셨는지 찾아보려 한다면, 헛수고일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들의 눈을 깊이 주시하면서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치료소를 세우지는 않으셨고, 그런 치료를 위해 직접적인 준비 작업을 하지도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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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문화(culture)’라는 말은 라틴어 동사인 ‘콜레레(colere)’에서 왔다. ‘콜레레’라는 말은 ‘경작하다(cultivate), 보살피다(car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농부가 자신의 논밭을 경작하는 일과 관련된다...개인적이고도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일꾼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왕관을 쓴 대리 통치자로서의 인간은 모든 씨앗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뿌려 논밭 안에 있는 것을 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땅을 경작하는 것이다. 논밭의 주인으로서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 또한 인격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 논밭과 하나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고백하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을 논밭으로 삼아 자기를 계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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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절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신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은 모든 문화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충만을 경정하신다. 대홍수 이전 고대국가들과 이집트, 페르시아, 로마, 그리스, 바벨론 등의 문명들의 때를 그분이 결정하신다...그러므로 모든 문화는, 문화적인 것으로 보이는 한 구유와 문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한 십자가를 위한,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 어딘가에 있는 이내 깎일 하나의 돌무덤을 위한 여지를 만들기 위해 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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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건축가들이 건물을 세우고 있지만, 원래 추구했던 건축의 청사진을 잃어버렸다. 조각조각 흩어진 채 파편적으로 건축하고 있을 뿐이다...사람들은 문화적 도구들을 활용하여 건설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과 같다...영화 자체를 위한 영화, 스포츠 자체를 위한 스포츠, 예술을 위한 예술 등! 이들은 모두 문화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처럼 그 목적과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소위 ‘영역들’을 개발하는 기술은, 세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세상이 운영되는 보편적인 하나의 영역으로서의 전쳋와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야 한다...망치를 든 손은 건설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쳐부술 수도 있다. 스포츠나 영화가 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를 선하게 여겨 전체로부터 분리하는 행위가 세상을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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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신실한 사람이 어떤 문화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거의 불가능해 보여서 그 영여겡서 활동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 영역에서 하나님의 법을 준행할 때 받게 될 압력이 너무나 크고 부담스러워서 그 특별한 영역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회피도 죄악 된 일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은 그 영역에서 일할 경우 하나님의 법과 마찰을 빚게 되기 때문에 그 문화 자체를 피한다. 그러나 이런 주저함은 실상 하나님을 피하는 것과 같다. 지금 그는 입법자이신 하나님과 불편해지지 않으려는 바람에, 그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문화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거부가 정당화되거나 오히려 요구되는 경우는 오직 응급조치로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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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그 어떤 역사적 경향이든, 그 어떤 문화적 유행이든, 그것이 설령 역사적 실재로서의 기독교 위에 세워졌다 하더라도, 또는 이상적 기독교 위에 세워졌다 하더라도 그저 관념의 소산일 뿐이며, 반드시 죄악과 율법의 파괴와 불경건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지 바벨탑을 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출발점이 잘못된 까닭에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어 버린 것이다...’기독교’라고 불리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어떤 교리(doctrine)의 기초는 아니다...’기독교’라는 것이 지역, 국가, 인종, 심지어 기후 유형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이해되는지를 보여 준다. 요컨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라는 용어는 일종의 스핑크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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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자기 백성들 가운데 서서 자기 시대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할만한 ‘유행하는 사조들’이나 그에 반대되는 구체적이고도 세련된 이론 체계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문화양식이나 형태들에 관해서도 직접적으로 강의하지 않으셨다. 그저 한 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분의 고기잡이꾼들을 붙드신 채 설교하고, 지도하고, 기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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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문화적 성취란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들 중 하나이며, 문화적 의미를 배제한 채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신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이 전적으로 순전한 방식으로 문화적 삶을 이미 성취하셨고, 지금도 성취해 가고 계신다. 그분만이 타락 이후의 인생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말씀의 보증자(중보자)로서 그분은 문화의 토대요 견고한 기초이며, 최초의 근거, 성취자, 구속자, 그리고 혁신가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오늘날 세상의 문화에 대립하는 하나의 문화적 지표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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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함께하는 존재 됨’을 부여하셨다. 알곡과 가라지는 마지막까지 서로 나뉘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 ‘함께하는 존재 됨’조차도 인간에게서 제거될 것이다. 즉, 그들은 분리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만물이 그 지점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함께하는 존재 됨’을 통해 문화적 행위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일반적(general)사명이다. 마치 문화적 행위에 대한 욕구가 자연적인 것과 같다...오직 하나의 자연(nature)이 있지만, 그 자연을 활용하는 것은 양면적이다. 하나의 소재가 있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은 양면적이다. 하나의 지역이 있지만,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은 양면적이다. 동일한 문화적 욕구가 있지만, 그것을 추구해 가는 것은 양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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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가죽 작업복을 입든 박사 가운을 입든 무엇을 입든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망치와 낫을 깃발로 삼아, 고무장화를 신거나 연료통을 들거나 화가의 팔레트를 들고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섬긴다는 것은 각자를 향한 부르심에 따라 섬긴다는 의미이다. 영감(inspiration)없는 열정(aspi-r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위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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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나쁜 영화를 보기 위해 지불되는 돈(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이 선교 활동 같은 문화적 활동에 소비되어야 마땅한 것이다...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이, 다른 형제가 아버지 앞에서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까닭에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어떤 면에서든 문화 참여에 게으른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다...이목을 끄는 기독교적 무대를 세울 수 있는데도 그것을 자제하거나, 미학적이고도 예술적인 성격의 광범위한 기독교인들의 조직을 설립하지 않고 수천가지 다른 영역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영웅적인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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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문화적 과제는 당연히 ‘끝없는 과제’이다. 옳은 방식으로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우리의 지혜로운 장로야말로 복된 자이다. 자신은 모를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참으로 하나의 문화 세력이다. 사람들이 그를 욕한다 하더라도 내버려 두라. 그런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문화적 게으름뱅이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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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이 정복은 재정복이다. 소유물들이 영원 전에 예정되었던 대로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며, 적절하게 그 소유권이 회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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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창조된 생명의 본성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은 하나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능력 없이는 일분일초도 이루어질 수 없다. 질서를 명하고 모든 것을 적절한 위치에 두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면, 그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없이는 그런 발전이 단 한 순간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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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동산을 관리하라.” 이것은 구체적으로 ‘세계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계발하라’라는 문화적 사명이다. “충만하고 번성하라.”...”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라면, 문화적 작업에 자발적으로 임해야 한다(인간 안에는 그의 직무의 관점에서 인간 됨의 자질이 이미 창조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상의 권위를 대리하는 자로서 그분을 섬기는 일과 관련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미래를 발견하는 과정에 그 분이 보이도록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을 통해 말씀하신다...자기 계발과 자기 발전이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지만 분명히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과 의무임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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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물론 문화 속에 ‘공통의(common)’ 은총이 있다.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혜 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또는 일반적인) 은총은 없다. 그러므로 일반은총에 대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은 잘못되었다...여기서 나는 ‘공통’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공유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의 ‘공통’ 은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공통적인 은총이 문화 안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자들이 공유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들의 문화적 성취에 영향을 끼치는 은총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공통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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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긍정적인 문화 행위’라는 이름과 명예를 가질 수 없다고 하신다...목적과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에 부합하는 긍정적인 문화 행위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순종으로만 가능하다...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모든 개혁들은, 동시에 문화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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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시는 곳이다. 오직 교회, 즉 신자들의 어머니만이 ‘새사람’을 낳으며, 그 새사람들이 세상에서 문화적인 삶에 관한 모든 짐들을 담당하게 된다. 오직 교회만이 새사람들을 깨지지 않는 교제로 결합시키고, 삶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교회 밖의 모든 관계들에 대한 규범까지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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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그 어떤 기독교인도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이 왜곡된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성취해 가야 한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 나가지 말라는 명령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수누시아)와 날마다 교제해야 할 우리의 의무(코이노니아)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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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우리의 그리스도는 (감정적인 기도를)단순히 듣고만 계시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삽과 망치, 책, 바늘과 붓 등의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 안에 두신 모든 것(우리 자신을 포함해서)을 이끌어 내는지를 지켜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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