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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를 바꾸려면 아주 중요한 것을 바꿔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용어’Term다. 우리는 현실에서 전제를 바꾸려고 할 때 문장에 집착하곤 한다. 그런데 문장으로는 전제가 바뀌지 않는다. 전제의 변화는 문장이 아닌 용어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즉, 세계관과 전제를 바꾸는 아주 중요한 도구는 명제가 아니라, ‘용어’다...마틴 루터...그는 애초에 로마 가톨릭의 모든 잘못을 낱낱이 따지면서 개혁할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용어(칭의)에 대한 개념을 바꾸자 성경과 종교에 대한 이해 전체가 달라졌을 뿐이다. 용어가 바뀌자 모든 게 바뀌었다. 하나의 단어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하나의 용어는 이처럼 ‘파생성’과 ‘유기성’을 가진다...용어의 개념(전제)가 바뀔 때, 그 바뀐 개념과 충돌되는 다른 용어에 대한 재해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하나 연쇄적으로 바뀌면서 사람은 전인격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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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여기서 왜 첫째와 둘째라는 구분이 등장할까? 만일 이웃 사랑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인본주의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이 먼저 오고 이 전제로 이웃 사랑을 생각하면 신본주의가 된다. 둘 다 사랑이지만 논리상의 순서, 곧 전제가 바뀌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라는 완전히 다른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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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경제적 평등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마26:11)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가난한 자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섭리하셔서 그리스도인이 섬길 대상으로 삼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생래적으로도 평등하지 않다. 러셀 커크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평등은 인위적인 산물이지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키...지능...성격과 취향...하나님은 이 땅에 창조하신 사람들을 결코 평등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고 저마다 차이가 존재한다...평등하다면 섬김을 받을, 섬김을 줄 이유가 없어진다. 사랑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 평등케 하려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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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자들은 “나는 책임을 덜 지는 삶을 살겠다! 의무도 덜 이행하는 삶을 살겠다!”라고 외치며 투쟁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지겠다. 내가 이행해야 할 의무를 지겠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따라 자기희생의 길을 걷는다. 실제로 주님은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가르치셨다(막8:34;눅9:23). 신자는 결국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인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성령꼐서 주시는 자원하는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세상은 결국 십자가 안에서만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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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가르침은 결국 만물의 회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곧 모든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교회를 사용하신다. 교회는 국가 정치의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단순한 무관심은 사실상 그 영역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욱이 국가는 다른 영역보다 사회 전반의 모든 문제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할 수있는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가 말했듯 국가의 정치는 사람의 도덕성과 직결된다. 국가의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사회의 도덕성이 비성경적으로 추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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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칼빈이 부당한 권력에 복종하라는 말이 주 안에서만 순종해야 한다는 말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먼저 이해해야 한다...악한 정권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우리는 주 안에서만 순종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 되며, 그 권력으로 인한 박해를 순순히 받는 것을 통해 악한 권력이라도 복종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고난받음은 우리로 하여금 악한 정권을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악한 정권에 타협하여 고난(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합법을 가장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며, 더 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쌓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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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종교개혁의 산물인 기독교는 개인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이걸 개인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여기서 상당수 사람들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를 염두에 둔 개념이다. 이는 법 안에서 인간의 독립적인 사고와 활동을 존중해주는 것을 뜻한다...기독교적 사고는 항상 사회의 책임에 있어서 개인을 먼저 고려한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가 굉장히 혼란해졌다!”라는 문제...우리는 사회 전체에 책임을 떠맡기기보다 먼저 내 개인의 책임과 죄를 참회하며 시작한다...개인의 각성과 인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 기독교적 사고다...문화에 대한 접근 방식도 기독교는 개인의 변화를 우선시한다...그러므로 기독교는 문화를 통해 전도하는 것보다 개인의 전도를 통해 사회와 문화를 바꾸는데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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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는 “철학은 소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예술은 다수에게 영향을 미친다.”라고 했다. 철학은 철학적 용어가 익숙한 지성인에게 주로 영향을 미치지만, 예술은 오감의 자극을 통해 직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자극을 통해 얻어지는 느낌으로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쉐퍼는 이런 점에서 예술의 강력한 영향력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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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은 내가 만족하기 위한 종교적 수단이 아니다. 찬양을 받으실 대상이신 하나님만 고려돼야 한다. 우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면 과감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선물하는 사람이 고려해야 하는 것은 내 취향과 만족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상대방의 취향과 만족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늘날 CCM에서 이런 고려를 찾아보기는 정말 힘들다.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보다 찬양하는 회중의 취향이 더 고려된다...출애굽기 32장에 언급된 황금 송아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고려 없이 자기 방식대로 자기만족적인 종교행위에 심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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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쉐퍼는 “예술은 그 작품 자체로 평가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 간혹 신자들이 예술가의 종교나 품행에 근거하여 그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있지만 쉐퍼는 이런 태도를 반대한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마블 시리즈의 영화들을 보게 되면 반성경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신자는 이런 세속 영화에서 반성경적 내용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작품 안에서 반성경적 내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외의 시나리오의 탁월한 구성이나 배우의 연기력, 훌륭한 그래픽 등과 같은 탁월한 예술성에 관하여는 높게 평가할 수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에 위배될지라도 기독교 예술에서 활용할 만한 작품의 탁월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계관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계관은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그러나 예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의 탁월함은 수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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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기독교적 노동은 노동의 결과로 얻은 이윤을 사익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사고를 갖는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 시민에게 “나는 이웃을 위해 이 재산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즉, 국가에 의한 분배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자발적인 나눔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진국은 자본주의가 들어갔음에도 “사회 기부”가 흔하게 일어나는데, 이는 기독교 윤리가 자본주의에 밑바탕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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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진보 혹은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은 새로운 용어를 상당히 잘 만든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용어 왜곡은 구조주의 철학에 근거를 둔다. 구조주의자들은 용어를 바꾸어서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 계통의 사람들도 그들의 생각을 이어받아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왜곡한다. 용어를 왜곡해서 우리의 사고와 세계관을 송두리째 개조하려는 속셈이다...그래서 용어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용어를 지키거나 되찾아오는 방법이 훨씬 빠르다...보수는 사실 “Reform”의 뜻과 같다...가장 역사적으로 원본Original과 표준Standard에 가깝게 해당되는 형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이 형태는 역사에서 이미 검증됐기 때문에 굉장히 안전하다.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형태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표준에 더 발전시켜 쌓아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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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억지로 지킨다면 그에게 법은 억압이 되겠지만, 법을 사랑해서 적극적으로 지키는 사람에겐 그것이 자유가 된다. 예를 들어, 공부를 너무 싫어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 학생에게 공부에 대한 요구는 억압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학생이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그래서 공부를 사랑하게 됐다. 이후부터 이 학생에겐 공부를 하라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가 된다. 도리어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에겐 억압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한다...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억압으로 느낀다...’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심으로 가득...그런데 복음을 통해서...율법...즐거움이 된다...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하신 말씀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방종의 허락이 아니라, 율법을 싫어하는 심령이 율법을 즐거워하도록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자유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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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사람의 마음에 있는) 이 갈망과 무력함은 한때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있었으나 지금은 빈 공간과 윤곽만 남았음을 선언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이 무한한 심연은 무한하고 불변하는 대상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모든 것으로 채우려는 건 헛수고이다. 이곳은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는 대상, 즉 하나님 자신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무한으로만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세상의 유한으로 이 공간을 채우려다 보면 블랙홀 현상이 발생한다...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왜 우리가 복음 전해야 하는지...한편으로는 이 땅의 사람들이 생수를 놔두고 계속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하려는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불쌍히 여기고...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 것으로 해소하지 못하는 갈증에 대한 유일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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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뺏기는 누군가는 불행하기 마련이다. 또 모두의 행복을 위해 부자들의 소유를 빼앗아 골고루 나누면 다수가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부자들의 것을 다 빼앗으면 부자가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빼앗을 부자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빼앗을 부자가 사라지면 어디서 빼앗아 골고루 나누겠는가? 서로 빼앗아 나눌 수밖에 없다. 그러면 빼앗기는 불행은 이제 모두의 것이 되고 만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모두가 착취당하며 불행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평등하기 위해 서로 빼앗다 보면 빼앗을 자원이 다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해진다. 이런 사실은 현실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을 비롯한 역대 공산주의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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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이중 강령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신자는 자기 권리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섬길까?”에 관한 책임과 의무가 앞선다. 이는 자연스럽게 참된 기독교, 곧 신본주의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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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일루미나티가 상징으로 사용하는 피라미드는 항상 미국 국새와 달리 “완성된 피라미드”이다. 완성된 피라미드란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완성할 수 있다. 정치를 완성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정치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정치는 불완전하며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려진다는 신본주의적 관점과 또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정치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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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작은 정부는 사람에게 역할을 많이 부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개념이다...아담 스미스의 사상...”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뜻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다는 전제로 바라본다. 그래서 기독교적 관점은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 이는 정부가 국민을 최소의 필요만큼 통제하며 다스리는 것...국민 개인의 자유를 최대하능로 보장...반면 인본주의의 관점은...”완성된 피라미드”...조지 오웰의 <1984>...사람의 통제와 설계를 통해 완전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정치관의 산물...큰 정부가 요구...벤 샤피로는 “정치는 행복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틀을 만드는 작업이지 그 자체로 행복의 근원은 아니다.”라고 적절히 지적...북한은 국민의 의식주를 책임진다...국민 통제의 수단...국민의 국가 의존도가 높을수록 국민은 그만큼 국가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사회 개량론...오웰의 <1984>에는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거나 정부가 요구하는 바에 대해 거부감을 품는 사람을 위한 수용소가 등장...고문, 강압, 세뇌...이런 개조 작업을 통해 정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에 적합한 사람”으로 개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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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사고, 곧 개인주의적 사고가 확립되면 교회는 교인의 숫자가 많고 적음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도리어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섰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개인을 시작으로 전체를 바라본다...전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은 개인의 존엄성이나 도덕성을 무시하고 항상 효율성을 강조한다. 전체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도덕성은 쉽게 간과된다...전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는 항상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맹렬히 시위하며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먼저 기독교는 개인의 변화를 통해서 구석구석이 변화되면 결국 전체가 변화된다고 믿는다. 물론 쉐퍼가 말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정말 최종적인 상황에서만 고려할 부분일 뿐이다. 이보다 먼저 기독교의 사회변혁은 개인의 변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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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를 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돈이 전체를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물질만능주의의 문화를 형성한다. 또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를 쾌락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쾌락적 문화를 형성한다. 그 외에도 성공, 명예 등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하나는 참된 존재의 문제이고 이에 대한 인식이 문화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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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복음의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 문화는 복음의 결과로 이해돼야 한다. 교회가 문화로 사람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다는 발상은 정말 순진한 것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문화로 전도하지 않았다. 도리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했다(고전1:21). 그들은 복음으로 문화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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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신자가 일터에서 성경적 직업관으로 하나의 문화적 흐름을 형성하는 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과 같다...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신자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문화를 모방하는 자들이 생겨날 때 이것이 전도의 방편이 될 수 있다. 물론 복음 외에 그리스도를 영접할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아름다움을 물씬 풍기면 사람들이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복음을 전할 기회가 문화를 통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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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회화는 아파트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수비를 행하는 하나의 전투무기입니다.” 피카소 자신도 예술이 윤리를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예술은 분명 궁극적으로 예술가의 목표하는 가치관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그 가치관을 특정한 윤리적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예술(미학)과 윤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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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쉐퍼는 둘째로 “예술로 표현된 것이 세계관을 더욱 강화한다.”라고 주장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평범한 진술보다는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고 선물을 주면서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더 강력하게 고백을 전달할 수 있다...심지어 성경조차 진리를 설명문처럼 줄줄이 나열식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역사, 산문, 시, 묵시문학, 편지와 같은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사용한다...따라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단순한 정보 전달만을 고수하기보다 예술성을 강화하여 복음을 전달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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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코넬리우스 반틸의 말처럼 먼저 기존 세계관의 철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는 불편한 일입니다...성경적 세계관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나는 타협을 하고 있거나 그냥 부분 리폼 정도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세계관이란 제목을 붙일 때 이미 전쟁을 선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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