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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들의 가장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데 있다. 이런 사상은 카톨릭교회의 교리로 정착했고, 이후 전 교회사를 통해 시대마다 등장하여 정통 기독교의 진리와 교리체계를 붕괴하기 위한 술책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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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다...예수의 인간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 등으로 예수의 신성은 사라지고 예수는 그저 타종교의 지도자와 같은 종교가 되고 말았다. 예수가 타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순간, 기독교는 참 진리를 가진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러자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대표적으로 존 힉은 성육신 사건을 상대화시킴과 함께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각자의 진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종교 간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선 기독교가 주장하는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절대적이며 독선적인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WCC, KNCC등이 중심이 되어 시도하고 있는 운동이 최근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그 본질은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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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바울이 염려한 것과 같이 초대교회의 최대 약점은 교리체계의 미확립으로 인한 부실이었다...이런 혼란의 주된 원인은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초대교회는 완전한 교리를 구축할 수 없었는데, 겨우 2세기말 무렵에 이르러 교부들의 활약으로 이단들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었다. 교부 이레니우스가 <이단논박>을 통해 이단에 대한 초기적 대응을 한 것은 매우 획기적이고 괄목할만한 일이었다. 초대교인들의 순수한 신앙, 열정적인 신앙, 헌신적인 신앙은 누구보다 강하고 뜨겁고 놀라웠지만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지성적 능력은 혈저히 부족한 상태였다. 대개 이단들은 먼저 순진한 자들을 미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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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란(그노시스), 곧 지식을 뜻하는데 이 지식은 단순히 세상에서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깊은 영적인 체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을 말한다...영지주의자들의 주요한 하나의 특징...그들은 신비적인 방식으로 신을 체험하는 것을 절대화했는데, 이 결과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 만족을 하지 못하고 성경 이외의 더 깊은 세계를 탐닉하고 여행한다는 것이었다...영지주의자들은 성경만을 고수하지 않고 성경을 포함한 다른 방식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이 탐험가들은 깊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 결국에 어떤 궁극적인 영을 만나고 그 영과의 합일을 추구하며, 드디어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신적 경지를 터득하고 누린다고 강설했다. 이 방식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단의 공통된 특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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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1 그룹은 희망도 없이 육 혹은 물질의 세계에 잡혀 궁극적으로 멸망할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고, 제 2그룹은 혼의 차원에서 유대교 성경의 하나님에게 속한 기독교인들로서 멸망하지 않지만 2등급의 구원을 얻는 부류이고, 제 3그룹은 마지막으로 영들(Spirituals)로서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며 신적인 세계의 충만(플레로마)에 속하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모든 이단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자기에게 속한 구성원들을 계급이나 신분 등으로 나누어 차별화하는 이른바 ‘계급주의’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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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의 침투는 교리 없는 기독교가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을 부정해서 성경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내용을 배격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육신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따로 구분했다. 이는 19~20세기경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따로 분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의 평범한 젊은이를 잠시 사로잡은 어떤 영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선택받은 일부에게 있는 영이 현재 육체에 갇혀 있으므로 이 몸에서 해방되면 다시 영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핵심교리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꽌이고, 다른 하나는 구전이나 비밀문서들이 전해주는 은밀한 진리에 관한 믿음이다.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매우 쉽게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이것이 이단들이 갖는 대중적인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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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영향력은 정치 부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의 유산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선출의 과정만을 논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네바의 정치제도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법에 대한 만인의 평등,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이 모든 것이 칼빈의 사상이 그 기반이었다...칼빈주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서구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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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신조는 신앙의 주관주의의 위험에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입장에서 한 사람의 신자를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성령의 안내자이다. 구원론에 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 도르트신조는 영원히 신앙의 길잡이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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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롱크 목사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도르트신조를 이해하는 비결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많은 사람이 ‘제가 선택받은 자인가요?’라고 묻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시작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당신은 자신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소망이신가? 내가 가난하고 비참한 죄인으로서 그리스도께로 도망가서 구원해 달라고 그리스도께 달라붙는가?’하고 물어야 합니다. 오직 그런 이후에야 우리는 다음 질문 ‘제가 택함 받은 자인가요?’를 할 수 있ㅅ브니다. 만약 첫 번쨰 질문에 대한 답이 ‘예’라면 다음 질문에 대한 답도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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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센파Essenes...쿰란(Qumran)동굴을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금욕주의적 삶을 강조하며 독신을 장려...이들의 율법준수는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했고 성경해석은 묵시적 경향을 가졌다. 중세의 수도원주의자들이 이들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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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파Sadducees...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귀족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집단이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로마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며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던 바리새파와 대립했다. 수직적으로는 바리새파에 열세였지만 제사장직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 영향력은 바리새파보다 우월했다...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고 안주하기 위해 어떤 형태이든지 율법의 변화를 거부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주후 70년 성전의 파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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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의 랍비학교들은 두 학파에 의해 가르쳐졌다. 먼저, 샴마이(Shanmmai)학파는 이방인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극우 보수파에 속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자구적 해석에 몰두해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많았다. 다음으로 힐렐(Hillel)학파는 이방인들에게도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진보적 단체였다. 이들은 율법 그 자체의 자구적 해석보다는 율법을 통해 어떻게 현실에서 율법의 고귀한 정신을 실현할까에 몰두했다.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배우는 것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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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을 꼽자면 바로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일 것이다. ‘어떻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계실 수 있는가?’하는 이 난해한 논쟁은 주후 318년부터 381년까지 약 6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논쟁의 계기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Arius,250?-336?)장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부터 삼위일체 논쟁이 촉발되었다. 주후 318년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더 주교와 함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본질상 아버지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했다...아리우스의 이런 주장에 제동을 걸고 나온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알렉산더 주교이다. 그는 아리우스가 성자 예수를 피조물로 격하시키면서 ‘구속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본질을 크게 훼손한다고 보았다. 물론 알렉산더도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해석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이라고 한 사람이다...회의 끝에 아리우스는 출교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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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공의회’(Concilium Nicaenum Primum)라 부른다...‘니케아신경’(Nicene Creed)이 6월 19일자로 채택되고 발표되었다. 이로써 니케아 신경은 기독교 역사상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분명히 정립한 최초의 신경이 되었다...이 회의 때 아리우스파를 정죄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이다...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체계의 머릿돌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본 것이다...이 교리를 기준으로 정통과 이단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었고...만약 이 회의를 통해 아리우스파가 정죄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소위 말하는 ‘타력 구원’의 잘못된 구원론이 득세했을 것이며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철학과 종교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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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먼저 나신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는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른 것과 놀라운 조화를 이룬다. 요한은 ‘독생자’라는 용어가 그리스도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또 문법적으로 ‘나셨다’(begotten)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의 피조물 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전혀 시작점이 없으신 하나님을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분은 그저 영원 무궁히 거기 계신다. 그곳에는 그분이 거기 계시도록 만든 물질도 인간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혼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본질과 영광에서 하나님과 하나이시지만 위격이 다르기에 영원으로부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셨던 분이다...인격적인 재생(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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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펠라기우스는 정반대로 본 것이다. 즉, 펠라기우스가 종교의 윤리를 강조했다면 어거스틴은 종교의 본질에 대해 성찰한 것이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412년과 418년에 칼테이지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교회회의와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2차 세계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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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거스틴은 76세를 일기로 영원한 도성에 들어갔다. 그해 430년 8월, 어거스틴이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던 그 때에 악명 높은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여 힙포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힙포의 모든 시설들을 파괴했지만 어거스틴이 사역한 교회와 도서관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이후 이 도시에 정착한 반달족의 후예들은 세월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기독교인들이 되었다. 로마는 점점 쇠퇴 일로에 접어들었지만 힙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즐겨 읽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약 800년 뒤, 대부분의 유럽 대학들은 힙포의 사람들이 아끼던 어거스틴의 책들을 기초로 대학의 커리큘럼을 완성해 갔다...종교개혁가인 칼빈은 어거스틴이 바라던 그 도성을 제네바에 세우고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잠시나마 제네바는 신의 도성으로서 그 역할과 사명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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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랭 대수도원장을 지낸 파우스투스(Faustus)는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에 대항하여 <은총에 관하여, De Gratia>를 저술했는데, 그는 먼저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지를 신봉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하고, 원죄를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힘으로 보았으며, 이 힘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극복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에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거스틴의 주장과 달리 인간이 타고난 의지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는 결단을 내릴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인간은 ‘믿으려는 감정’을 가지고 ‘믿음의 시작’을 결단할 수 있다고 했다. 상호 대척점에 있는 주장들을 절반씩 취했다는 이유로 교회사에선 이들을 ‘반(semi)펠라기우스주의’라 부른다...타락도 완전 타락이 아니라 부분 타락으로 보았다. 결국 그들이 정리한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손을 내밀 때 인간 쪽에서도 같이 손을 내밀어 서로 붙잡을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른바 ‘신인협력설’(Synergism)이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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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반펠라기우스)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능력으로 구원을 향하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하지 않으며, 이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의 입장에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 아니므로 인간에게도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초대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한 ‘다른 복음’이자 ‘행위구원론’의 부활이었다.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 없이 ‘독자 독존 독립’을 지향하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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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기초한 구원론을 가르쳤다. 이는 유사성의 과정에서 획득되는 방법론인데, 즉 완벽한 하나님과 유사한 일들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을 구원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인들에게 구원이란, 인간이 선행(금식, 자선, 독신, 순례, 유물, 십자군, 면죄부, 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 등)을 통해 신과 유사해지려는 노력이며 성취였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이 선행의 업적을 쌓는다고 해도 내적 불안과 공포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롬 1:17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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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후계자인 베자(Theodorus Beza, 1519-1605)에게서 수학한 아르미니우스라는 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모든 칼빈의 신학적 사상들을 수용했지만 칼빈의 예정설만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반 펠라기우스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하나님의 절대예정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유기설을 부정했고 나아가 원죄설을 완화시켰다...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1610년에 그의 추종자들이 예정론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개혁교회가 표방하는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총회에 항론(Reman-strance)을 제출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들은 ‘항론파’로 불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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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절대적 선택이나 절대적 유기(reprobation)을 믿지 않았고 다만 견인에 대한 택정(예지를 기초로 한)과 불신앙, 불순종, 죄 안에 그대로 머무는 것에 대한 유기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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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이 구원을 위한 어떤 영적인 능력이 없음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믿고 회개할 능력을 준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 것인데 이에 비해 웨슬리파는 이것을 하나님 편에서의 값없는 은혜의 문제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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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초자연적인 종교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단지 이성의 한계 내에서 가능한 종교만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슐라이어마허, 리츨, 트뢸취 등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을 통해 기독교내로 침투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잉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칸트의 사상을 자율성, 발전, 자연, 조화로 분류하여 강화시켰다. 반면에 그렌츠&오슨은 칸트의 사상을 이성과 본성, 자율과 조화 그리고 성장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인간 자율성의 한계를 말하며, 신학을 자연과학과 철학에 종속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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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는 칸트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시대였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적인 지식론을 바탕으로 플라톤이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를 구분한 것처럼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혹은 본체계, 오성으로 인식되는 체계)로 구분하고, 이성의 한계에서 종교의 가능성을 논함으로서 초자연의 세계를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자유주의(Liberalism)는 이성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칸트의 후계자가 된 셈이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18세기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계몽주의와 이후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자극에 의해 출현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그 결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유주의는 하나님과 인간을 동등한 반열에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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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대표적인 관념론자이다.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을 강조했다면 헤겔은 이성의 관념을 확대하여 정신의 모든 측면과 이성을 동일시하는 사상을 전개했다...헤겔의 철학적 동기가 슐라이어마허와 같이 원래는 기독교신앙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그는 생각하기를 역사 전체를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로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그의 변증법이 출현했다. “...절대자는 정적 실체자일 수 없고 일체의 상대를 그 안에 포괄하고 있는 살아 있는 주체이다. 이 운동은 이성과 실체에 통하고 그 이성의 법은 변증법이다” 헤겔의 이 변증법을 성경과 기독교의 본질연구에 적용한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스트라우스와 바우어가 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와 이상적 예수의 관계를 헤겔이 시도한 변증법적으로 풀어보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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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칸트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가 발현했고, 자유주의는 개인주의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세상의 풍조들은 신학자들에게도 많은 도전을 주었다. 그런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멸시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풍조에 휩쓸렸다. 이 때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풍조 앞에 종교의 본질을 논함으로서 도전받는 기독교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는 먼저 종교는 형이상학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며 또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은 종교라는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그의 잘못된 신학과 사상은 훗날 자유주의신학을 태동시켰고 이로서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종교를 우선 직관과 감정의 영역으로 설명하면서 새로운 자유주의신학의 체계를 완성시켰다...역사비평에 근거하여 재해석하는 신학을 출현시켰다. 이후 대부분의 유럽의 신학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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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츨은 윤리에 신학의 중심을 두었다. 그는 예수를 인간이 따를 위대한 윤리의 모범자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예수와 함께 발전하고 성숙되어진 도덕적인 나라라고 했다. 그는 죄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죄는 무지의 결과로서 도덕적 양육과 교육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리츨과 그의 추종자들은 칸트에서 나타나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왕국의 영역으로 종교의 수준을 끌어들인 결과를 낳으며 자유주의 신학의 종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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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신학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주제들을 버렸다. 그들의 목표는 도덕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다...이러한 영향으로 라우센부쉬가 주도한 사회복음주의운동이 태동하였고, 최근에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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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T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