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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라는 이름은 헬라어 ‘도케인’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전 헬라어에서 ‘도케인 모이’라는 표현은 내가 보기엔 어떻다, 내 생각에는 어떻다라는 뜻뿐만 아니라 내 결론으로는, 내가 확신하기로는, 나는 이렇게 확신한다라는 뜻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교의’라는 말에는 특별히 이 확실성의 개념이 나타나 있다...교의에는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과학적, 철학적, 정치적 교의도 있다. 근본적이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과학의 원리, 철학에서 자리잡힌 가르침, 정부의 법령,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종교의 교리 등이 모두 교의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마땅히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의 개념에 대한 그들의 비판 중 많은 부분이 교의가 전적으로 종교에만 있는 어떤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의의 공통점은 모두가 어떤 권위를 옷입고 있다는 것이다...종교적 교의는 (실재적이거나 가정된) 신적 권위에 기초함으로써 권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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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는 주장을 종종 들을 수 있는데 이 말은 꽤 경건한 느낌을 주고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상은 위험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메첸...[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다시 한번 강조...기독교가 메시지의 기초 위에 세워진 삶의 방식이라는 것...진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만 계시된 것이 아니라 이것들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해석에서도 계시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를 그리스도께 합당하게 복종시키고 성령 안에서 새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인 것이다. 그 생명을 받는 것은 그저 신비적으로 은혜를 주입하는데 달려있거나 인간의 올바른 윤리적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딤전2:4) 원하신다고 했다...신약 모든 곳에서 기독교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를 나타내신 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조건으로 하며, 여기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구속적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항상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성경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는 진리를 무시하고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절대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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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는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신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교의학자는 자기의 입장을 자기가 속한 교회의 고백적인 가르침에다 두며 이것이 그의 성향을 형성한다...선입견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학문적 작업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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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와 바빙크 모두 신학자가 성경의 진리들과 사실들을 “인증해야”(authenticate)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이것이 사실상 모형적 신학이라는 개념을 파괴하며 논리적으로 신학자를 다시 한 번 자연주의적 학문의 지배를 받게 만든다는 이유로 올바르게 반대하고 있다. 카이퍼는 하나님을 학문적 연구의 직접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사실 카이퍼는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지식, 오직 그것만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대상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은 신학의 궁극적인 대상이긴 하지만 당면한 대상은 아니며,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신적 자기 계시를 통해 매개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그 지식의 다양한 자료들을 자기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들을 그 거대한 통일체 안에서 제시하며 그것들을 인간의 의식을 만족시켜 주는 틀 속에 부어넣고자 하는데, 오직 그 학문은 신 지식에 관한 통찰력을 심화시켜 주는 한에 있어서만 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1) 카이퍼가 신학이라는 학문은 “하나님을 아는 것 즉 하나님 알기를 배우는 것” 이외의 다른 동기를 용납하지 않는다구 주장한 것, (2) 그가 하나님은 인간적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한 것은 다만,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학문적 지식을 우리 스스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3) 그리고 그가 신학에서 “더이상 하나님이라는 실재가 아닌 종교라는 실재가 탐구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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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은 모두 이 교권적인 관점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고 어떤 합법적인 교회가 공식화한 교의들을 신적인 진리로 인정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므로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그 교의에 항구성과 안정성이 상당히 있다고 보았지만 교의가 무오하다고 보지는 않았으며 이 관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슐라이에르마허를 통해 현격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교의의 원천을 객관적인 것에서부터 주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교의의 원천으로 보았으므로,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에 대해 교회가 권위를 부여한 표현이 바로 교의라고 생각하였다. 리츨의 신학은 교의의 개념에 있어서 좀더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똑같이 주관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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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교의가 표현할 교리적 가르침들은 나오지만 교의 그 자체는 없다. 이 교리적 가르침들은 오직 교회가 그것들을 공식화하고 공적으로 채택할 때만이 교의가 된다. 종교적 교의는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종교적 교의의 주자료는 성경에서 나온다는 점, 교의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진리를 교회가 숙고한 결과라는 점, 교의는 어떤 권위있는 교회집단이 공적으로 채택한 것이라는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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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에르마허는 교회 교의의 자료적 내용을 성경에 계시된 사실이나 진리가 아닌 기독교적 의식이나 기독교적 경험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는 신앙의 항목들을 “언어로 표현된 경건한 감정의 개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슐라이에르마허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의 교의가 객관적으로 진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의의 다양한 상태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에질은 슐라이에르마허가 교의를 “늘 변하는 삶”의 표현으로 본다고 하면서 이것은 종교적 “신앙”을 진술함에 있어서 그 어떤 항구적인 권위도 부정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그가 신아에 대해 말할 떄도 교회의 신조에 나타나 있는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신앙, 즉 내용으로서의 신앙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신앙 곧 신뢰로서의 신앙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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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경 지면에서 확정된 형태의 교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계씨된 진리들을 숙고함으로써 교의를 얻는다...이 성찰 활동의 주체는 그리스도인 한 개인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교회 전체이다...교회는 진리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과거에 있었던 위대한 교리적 논쟁들의 신세를 톡톡히 지고 있다. 제베르그는 교의를 구성하는 일에 참여한 수많은 요소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의는 대단히 복잡한 역사적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에는 다양한 구성요소가 있는데 그 요소들은 다양한 형태의 반론을 접했을 때, 많은 실제적(이고 윤리적이며 경건한) 자극과 외적인 (정치적, 정경(canon)적인) 동기들에 의해, 또 서로 다른 신학적 조류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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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를 구성하는 마지막 단계는, 어떤 공적인 교회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공식화하고 공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이때 생겨날 수 있는 질문은, 믿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어느 교회가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르낙은 사실상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교회연합의 공의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로 그는 개신교 교의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개신교가 교회의 연합을 깨뜨렸으며 개신교는 통일된 전선을 내세울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교회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특별히 모든 개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완전히 대표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의의 권위 또는 가르침의 권위 즉 교회 내에서 무엇을 교의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개교회가 자기와 비슷한 많은 교회로 구성된 보다 큰 조직의 일원이 된다면 그 교회는 이 문제를 당연히 상급 회의에 일임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이 공의회가 구성한 교의만을 유일한 참된 교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교회가 공적으로 확증한 교의는 그 교의를 인정하는 영역 내에서 권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이 권위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의 차이가 있다...종교개혁의 교회들은...교리는 교회가 공식저긍로 규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교의가 되지 않으며 교회적 권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교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는 이유만으로, 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될 때만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교의가 자료적으로는(즉 내용에 관해서는) 그 권위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에서만 끌어오지만, 형식적으로는(즉 형식에 관해서는) 교회로부터 끌어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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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영향으로 교의는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헤겔은 자기 시대의 반교의적 정신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사변적 철학을 이용하여 기독교 교의를 재건해 보려고 하였다. 2세기의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그는, 만약 기독교가 실제로 하나의 철학이라는 것이 인정되기만 한다면 자연히 식자층에서 인기를 얻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기독교의 교리들은 그림의 형태로 된 사변적 지식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그의 견해로는, 철학적 진리의 참된 정신적 핵심을 해방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형태만 벗겨내면 된다는 것이었다...소위 껍질을 벗기고 난 다음에는 기독교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과 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와 전혀 다른 어떤 것임이 밝히 드러났다. 카프탄의 말과 같이 헤겔의 수술은 사실상 “교의의 파괴”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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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만약 공통된 신앙고백을 갖고 있다면 당연히 그 교회는 교리상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교회는 교회가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공식화하고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교회는 반드시 그릇된 자들을 다루어 그들을 바로잡고 책망하고, 또 양떼로부터 쫓아낼 수 있어야 하지만, 이 일 역시도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그에 따르는 분명한 판단기준이 없다면 지혜롭고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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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그리스도인이 신적 계시의 내용 전체를 이해하고 합당하게 재생산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또 한 세대가 그 일을 성취할 수도 없다. 교의를 공식화하는 일은 모든 시대의 교회의 일이며, 이어지는 세대들 편에서 엄청난 영적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그렇지만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 측에서는 과거와 절연하려는 뚜렷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그리고 슬프게도 오늘날의 소위 근본주의자들도 잘 알려진바 “신조가 아니라 성경을!”이라는 자기들의 구호를 가지고 자유주의자들에게 동조하고 있다...이 입장은 진리의 전개와 공식화에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개인주의를 주장하며, 오랫동안 존중되어 온 지난날의 체계보다 더 나은 종교적 진리를 새로이 구성할 수 있는 개인이나 한 세대의 교회의 능력을 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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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현상론은 일반적인 신학 개념에 거의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현상론은 학문적이든 아니든 모든 이론적 지식을 현상계에 국한시켰다...실천 이성만이 종교에서 믿을 만한 유일한 안내자이며, 종교의 명제들은 이성적인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지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적 원리가 종교에서의 주관주의의 길을 닦아 놓았는데, 슐라이에르마허가 이 주관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가 되었다. 그는 교의학을 가리켜 “기독교 신앙에 관한 학문”, 즉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관한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종교적 경험들로 이루어진 것...리츨주의자들 역시 교의학을 “개신교 신앙에 관한 학문적인 해설”이라고 정의한다...이 주관적인 경향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 시대에 대단히 인기있는 정의를 탄생시켰는데, 그것에 따르면 신학은 “종교에 관한 학문”, 보다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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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는 하나님의 능하신 구속적 행동뿐이라고 보는 사람들(포사이드, 바르트, 불트만, 미클럼 등)의 입장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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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개혁주의적 개념에 따르면 성경에는 교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의가 구체화시키는 교리적 진리도 담겨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지 않은 교리적 명제들은 절대로 교회의 교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개신교에서 교의로 표현된 교리적 진리들은 성경에 명백하게 담겨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추론”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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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교의주의가 경건주의적 반작용을 낳았던 적도 여러 번 있다. 경건주의의 특징은 종교에서 모든 종류의 지성주의를 혐오하며 정서주의와 경험을 종교적 삶에 대한 유일한 참된 표현으로 칭송한다. 경건주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마음의 피난처 곧 감정의 자리로 물러감으로써 교리적 논쟁의 말다툼으로부터 피할 것을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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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만약 누구든지, 교회가 제시한 교리에, 학문의 진보에 따라, 교회가 이해해 왔고 또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개신교 교회는 이 절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신교 교회는 그들의 교리가 성경 진리에 대한 올바른 공식화라고 보는 까닭에 그것들이 수용되기를 기대하지만, 교회가 진리를 확정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만약 교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권위가 없는 것이다...이 권위의 기초가 되는 것은 로마 교회의 경우 교회이고, 개신교 교회의 경우 성경이다. 둘 다 진리의 객관적인 표준을 인정하는데, 그 표준은 교회의 교의로 표현되어 있으며, 복종, 신앙, 순종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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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로마 교회의 교의 개념과 현대 자유주의자들의 교의 개념을 모두 거부하였다. 그는 교의(단수)는 계시와 일치하므로 교의에 대해서는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였고 교의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공식화한 교리적 진술들은 그것들이 계시의 뿌리에서 생겨난 것인 한 상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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