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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코프 조직신학

저자
루이스 벌코프
출판사
CH북스
출판연도
2017
커버
http://image.kyobobook.co.kr/images/book/large/030/l9788944785030.jpg
분야
종교
분야(소분류)
조직신학
추천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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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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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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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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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교의’라는 이름은 헬라어 ‘도케인’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전 헬라어에서 ‘도케인 모이’라는 표현은 내가 보기엔 어떻다, 내 생각에는 어떻다라는 뜻뿐만 아니라 내 결론으로는, 내가 확신하기로는, 나는 이렇게 확신한다라는 뜻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교의’라는 말에는 특별히 이 확실성의 개념이 나타나 있다...교의에는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과학적, 철학적, 정치적 교의도 있다. 근본적이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과학의 원리, 철학에서 자리잡힌 가르침, 정부의 법령,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종교의 교리 등이 모두 교의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마땅히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의 개념에 대한 그들의 비판 중 많은 부분이 교의가 전적으로 종교에만 있는 어떤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의의 공통점은 모두가 어떤 권위를 옷입고 있다는 것이다...종교적 교의는 (실재적이거나 가정된) 신적 권위에 기초함으로써 권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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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오늘날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는 주장을 종종 들을 수 있는데 이 말은 꽤 경건한 느낌을 주고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상은 위험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메첸...[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다시 한번 강조...기독교가 메시지의 기초 위에 세워진 삶의 방식이라는 것...진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만 계시된 것이 아니라 이것들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해석에서도 계시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를 그리스도께 합당하게 복종시키고 성령 안에서 새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인 것이다. 그 생명을 받는 것은 그저 신비적으로 은혜를 주입하는데 달려있거나 인간의 올바른 윤리적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딤전2:4) 원하신다고 했다...신약 모든 곳에서 기독교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를 나타내신 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조건으로 하며, 여기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구속적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항상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성경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는 진리를 무시하고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절대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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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와 바빙크 모두 신학자가 성경의 진리들과 사실들을 “인증해야”(authenticate)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이것이 사실상 모형적 신학이라는 개념을 파괴하며 논리적으로 신학자를 다시 한 번 자연주의적 학문의 지배를 받게 만든다는 이유로 올바르게 반대하고 있다. 카이퍼는 하나님을 학문적 연구의 직접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사실 카이퍼는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지식, 오직 그것만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대상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은 신학의 궁극적인 대상이긴 하지만 당면한 대상은 아니며,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신적 자기 계시를 통해 매개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그 지식의 다양한 자료들을 자기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들을 그 거대한 통일체 안에서 제시하며 그것들을 인간의 의식을 만족시켜 주는 틀 속에 부어넣고자 하는데, 오직 그 학문은 신 지식에 관한 통찰력을 심화시켜 주는 한에 있어서만 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1) 카이퍼가 신학이라는 학문은 “하나님을 아는 것 즉 하나님 알기를 배우는 것” 이외의 다른 동기를 용납하지 않는다구 주장한 것, (2) 그가 하나님은 인간적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한 것은 다만,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학문적 지식을 우리 스스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3) 그리고 그가 신학에서 “더이상 하나님이라는 실재가 아닌 종교라는 실재가 탐구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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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를 구성하는 마지막 단계는, 어떤 공적인 교회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공식화하고 공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이때 생겨날 수 있는 질문은, 믿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어느 교회가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르낙은 사실상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교회연합의 공의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로 그는 개신교 교의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개신교가 교회의 연합을 깨뜨렸으며 개신교는 통일된 전선을 내세울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교회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특별히 모든 개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완전히 대표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의의 권위 또는 가르침의 권위 즉 교회 내에서 무엇을 교의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개교회가 자기와 비슷한 많은 교회로 구성된 보다 큰 조직의 일원이 된다면 그 교회는 이 문제를 당연히 상급 회의에 일임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이 공의회가 구성한 교의만을 유일한 참된 교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교회가 공적으로 확증한 교의는 그 교의를 인정하는 영역 내에서 권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이 권위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의 차이가 있다...종교개혁의 교회들은...교리는 교회가 공식저긍로 규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교의가 되지 않으며 교회적 권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교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는 이유만으로, 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될 때만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교의가 자료적으로는(즉 내용에 관해서는) 그 권위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에서만 끌어오지만, 형식적으로는(즉 형식에 관해서는) 교회로부터 끌어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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