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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조직신학

저자
로버트L.레이몬드
출판사
CLC
출판연도
2004
커버
http://image.kyobobook.co.kr/images/book/large/897/l9788934107897.jpg
분야
종교
분야(소분류)
신학일반
추천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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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 일시정지
목표 값
1426
현재 값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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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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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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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매일 매일의 대화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의사소통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언어적이고 명제적으로 문자상의 진리를 전달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더 그럴 듯한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분명코 그분은 인간을 향해 자신의 의도가 왜곡되지 않은 채로, 문자상의 비상징적인 진리를 말씀하실 수 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에게 문자상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하나님꼐서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외부로부터 그들 자신에게로 온 그분의 문자상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 진리를 잃어버리거나 왜곡시키지 않은 가운데 언어교환의 방법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명백히, 이 능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특성의 일면이다)...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 창조물이며 모든 인간의 능력이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성경은 확실하게 단언하기를 인간의 언어는...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말한다...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나 여호와가 아니뇨?”(출4:11)라고 반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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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벌코프...”성령님의 증거는 죄인의 마음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일 뿐이며, 그것에 의해 죄인은 죄에 대한 무지를 제거한다...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한 즉각적인 확신...하나님께서 친히 제공해 주시는 증거...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성령님의 증거는 믿음의 최종적인 근거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수단이다. 믿음의 최종적인 근거는 오직 성경뿐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의 증거 안에서 신자들을 감동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뿐이다. 믿음의 근거는 믿음의 내용과 일치하며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성령님의 증거는 믿음을 갖도록 감동시키는 원인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성령님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서이다.” 벌코프와 마찬가지로 에드워드J.영 또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성령님의 증거는...오히려 그것은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초자연적인 사역의 측면으로 그 안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누이 열리며 그로 인해 한때 어둠 가운데 놓여 있었고 죄에 매여 있었던 우리들은 이제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마침내 이제 죄인들은 이 성경이 다른 어떤 책들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난생 처음으로 성경의 신성이 명확하게 인식...증명...그분께 속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진실로 어둠으로부터 그들을 끌어내어 빛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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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프란시스 쉐퍼...쉐퍼가 사망했던 1984년 5월 15일 며칠 전...마지막 글...세계관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본적인 근거...”...계몽주의 이래로 지성은 우주의 구조에 있어서 기본적인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우주의 기본적인 구조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은 우주 안에 종교도 지성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론 안에서 인격성 논쟁은 우주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도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도 다루지 않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윤리를 위한 자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에 있어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위한 자리도 전혀 남지 않는다. 또한 이 이론의 문제는, (사물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단순히 우리가 우주에 대해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특히 인간 자신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다시 말해, 인간은 단순히 수학적인 사물-또는 공식-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슬픔을 안겨줄지라도. 최악의 형태에 있어서 이것은 단순히 신비주의에 불과하며, 합리성을, 최종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오만한 자기중심주의...완전히 반대되는 입장-궁극적인 실재는 세상을 창조하셨던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입장-으로 되돌아가 그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고 우리를 지적인 해답의 자리로 되돌려 주며 갑자기 문을 열어준다. 그것은 단지 해답을 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 수 있고 숨쉴 수 있으며 기뻐할 수 있는 우주 안으로 우리를 다시 놓아준다. 만약 현대인이 정직하기만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붕괴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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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디모데후서3:16...최소한 바울에게 있어 “모든 성경”은 구약 성경을 의미했다...그러나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는 전문적인 범주 안에 그 자신의 것을 포함한 신약 문서들을 기꺼이 포함했었을 것이며, 또한 실제로 거의 그렇게 했다는 정당한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을 썼을 때 바울의 지시와 다른 것을 하라는 성령의 승인을 받았다고 주잫아는 자들에게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 7:40)라고 비꼬며 주장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신이 사도로서 기록한 것드링 성령의 감독 아래서 된 것이라는 인식을 표현한다.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라고 썼을 때, 바울은 그에게 임한 성령님의 감독하시는 영향력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5:18에서 바울은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쓰는데, 그는 계속해서 신명기 25:4과 누가복음 10:7 둘 다를 인용한다. 이것은 바울이 누가복음을 신명기와 동등하게 영감된 “성경”으로 보았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워필드는 그것이 후자-하나님께서 그 자신으로부터 ”성경을 불어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었으며 그의 결론은 일반적으로 학문적인 견해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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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아타나시우스는 유세비우스가 나누었던 수용된 책과 논박된 책 사이의 구분을 없앴으며...유세비우스의 정경 가운데 27권의 책의 목록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 이후로 교회의 정경은 사실상 결정되었고 4세기가 끝나가기 전에 제롬과 어거스틴의 지도 아래에서 교회는 그것의 만족에 관한 모든 정경적인 의문점을 해결하였다. 그에 따라 A.D.397년 제3차 카르타고 공의회는 “정경인” 책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읽혀져서는 안 된다고 요청하였고 그때에 오늘날 수집된 27권의 신약 책들을 신약 정경으로 확증하였다...요약하면 신약 정경에 관한 그러한 점으로부터 “문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논거”가 있었다...어떤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신약 성경의 구체적인 목록을 주시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섭리적인 인도하심 아래에서 교회가 책의 수와 “목록”을 올바르게 입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결괒거으로 이 “사도적 전승”은 이러한 오류 없는 기초와 증언으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교회의 정신 안에서 그것 자체를 인증하고 확정하였던 것...1,600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정경의 종결을 지지하는 강력한 정황적인 논거...요약하자면 27권의 신약 정경의 형성은 인간이나 심지어는 교회가 한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이 홀로 일하셨던 사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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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번역된 성경들이 저자의 원래 의도를 갖고 있는 한 동일한 정도로 이러한 번역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권위를 갖고 있다고 단언하는 데 있어 우리는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원본의 권위가 본래적이고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인 반면 번역본들의 권위는 파생된 것이다. 번역본들이 영감된 원본을 복사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것들을 “영감된 성경”이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오직 원본만이 직접적으로 영감되었고 그로 인해 무오하다. 원본에 대한 사본과 번역본들은 직접적으로 영감되지는 않았기에 다양한 종류의 오류를 갖고 있을 수 있다. 본문비평이라는 분야는 하나의 복사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본문을 옮기는 가운데 필사자들의 비의도적인 실수나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필사자들의 의도적인 노력으로 인해 이문(variant readings)이 발생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원본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오한 원본과 오류 있는 사본을 구분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시도가 편향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오류가 있는 사본들이며, 사본에 있는 오류들이 맨 처음 원본에도 존재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신학적인 이유로 인해 사본의 단계에 나타난 모든 본문상의 오류들이 원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진리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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