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Search
메모
🔥
페이지
만약 우리가 그분의 세계로부터 우리 세계를 향해 오류 없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성경 안에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식론적으로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식의 확실성을 위한 유일한 기반을 버리기 때문이며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유일한 하나님과 그분으로 인해 존엄하고 가치 있는 인격체인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 있는 기초”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Open
🔥🔥🔥🔥🔥
40
매일 매일의 대화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의사소통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언어적이고 명제적으로 문자상의 진리를 전달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더 그럴 듯한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분명코 그분은 인간을 향해 자신의 의도가 왜곡되지 않은 채로, 문자상의 비상징적인 진리를 말씀하실 수 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에게 문자상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하나님꼐서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외부로부터 그들 자신에게로 온 그분의 문자상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 진리를 잃어버리거나 왜곡시키지 않은 가운데 언어교환의 방법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다(명백히, 이 능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특성의 일면이다)...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 창조물이며 모든 인간의 능력이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성경은 확실하게 단언하기를 인간의 언어는...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말한다...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나 여호와가 아니뇨?”(출4:11)라고 반문하셨다.
Open
🔥🔥🔥
60
우리는 언어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정확히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전달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순되는 해석들조차도 동시에 옳을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진리는 오직 명제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며, 명제들은 언어와 분리되어서는 형성될 수 없다...언어 자체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문자상의 진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명제적으로 전달되거나 계시될 수 없다는 생각을 인정하는 모든 이론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이 되신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널리 알려진 아람어와 헬라어를 사용하여 무리들을 가르치셨으며 그분께서 실제로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이 영원한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시기 때문이다(요8:24,40)...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이 그러한 계시의 전달자임을 주장하셨기 때문...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명제적인 또는 정보적인 계시를 그들 신앙의 초석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진리를 믿을 때만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의 타당성에 대하여 확실성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Open
🔥🔥🔥
63
성경은 성경에 대해 유일하게 오류 없는 해석자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4항)...J.I.Packer...”더 나아가 성경에 있어서 2차적이고 모호하게 보이는 것은 1차적이고 명확하게 보이는 것에 비추어 연구되어야 한다...균형감각을 유지...”
Open
🔥🔥🔥
95
성경이라는 주제를 제1장에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다룸으로써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민첩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종교에 있어서의 최우선 문제가 인식론적인 것, 다시 말해 권위의 문제라는 점을 예리하게 알고 있었다. 고백서 작성자들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고백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당신들이 고백한 것이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소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이오”라고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보다도 앞서서 이러한 인식론적인 문제를 처음부터 다루는 것이다.
Open
🔥🔥🔥
101
“무오성”(inerrancy)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의미하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위성”(infallibility)와 같다. 즉, 그것이 주장하는 바가 영적인 실재의 영역에 있는 것이든지 도덕의 영역에 있는 것이든지 또는 역사의 영역이든지 과학의 영역이든지 간에 그 어떤 주장에 있어서도 성경은 틀리지 않으며, 틀린 것을 가르칠 수 없다...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의 참과 거짓을 평가할 때에, 성경이 기록된 상황 즉 성경의 용법이나 목적과 동떨어진 기준들에 의해서 성경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부족한 현대의 기술적 정확성, 문법이나 철자에 있어서의 인식된 불규칙성, 자연에 대한 관찰적 묘사, 과장되거나 대략적인 숫자의 사용, 자료들을 주제별로 배열하는 것, 병행적인 설명에 있어 자료를 다르게 수집한 것, 자유로운 인용문의 사용 등과 같은 현상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반대하기 위한 논거로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Open
🔥🔥🔥
119
벌코프...”성령님의 증거는 죄인의 마음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일 뿐이며, 그것에 의해 죄인은 죄에 대한 무지를 제거한다...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한 즉각적인 확신...하나님께서 친히 제공해 주시는 증거...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성령님의 증거는 믿음의 최종적인 근거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수단이다. 믿음의 최종적인 근거는 오직 성경뿐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의 증거 안에서 신자들을 감동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뿐이다. 믿음의 근거는 믿음의 내용과 일치하며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성령님의 증거는 믿음을 갖도록 감동시키는 원인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성령님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서이다.” 벌코프와 마찬가지로 에드워드J.영 또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성령님의 증거는...오히려 그것은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초자연적인 사역의 측면으로 그 안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누이 열리며 그로 인해 한때 어둠 가운데 놓여 있었고 죄에 매여 있었던 우리들은 이제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마침내 이제 죄인들은 이 성경이 다른 어떤 책들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난생 처음으로 성경의 신성이 명확하게 인식...증명...그분께 속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진실로 어둠으로부터 그들을 끌어내어 빛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Open
🔥🔥🔥
134
제임스 패커 역시 성경 안에 그러한 역설들이 존재한다고 자신의 저서 [복음주의와 하나님의 주권]에서 주장하였는데 그는 “역설”보다는 “이율배반”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패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비록 그것이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여튼 신학에서의- 이율배반은 실재하는 모순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명백한 진리 사이에 있는 하나의 표면상의 양립불가능성이다. 한 쌍의 원리가 나란히 있을 때,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것은 겉으로 볼 때 양립불가능한 것 같지만 둘 다를 부인하기는 어렵다...(이율배반은) 설명할 수 없다...그렇다면 이율배반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를 배우라. 표면상의 모순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Open
🔥🔥🔥
159
비극적이게도 위의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과 참된 이성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현대인은 진실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리는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첫째, 자신의 마음 중심에서 믿고 있는 것이 그 자신에 대한 참된 것이라는 즉 그가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옹호해 줄 유일한 기반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며, 둘째, 과학과 윤리에 있어서의 자신의 결정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Open
🔥🔥🔥
180
프란시스 쉐퍼...쉐퍼가 사망했던 1984년 5월 15일 며칠 전...마지막 글...세계관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본적인 근거...”...계몽주의 이래로 지성은 우주의 구조에 있어서 기본적인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우주의 기본적인 구조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은 우주 안에 종교도 지성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론 안에서 인격성 논쟁은 우주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도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도 다루지 않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윤리를 위한 자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에 있어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위한 자리도 전혀 남지 않는다. 또한 이 이론의 문제는, (사물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단순히 우리가 우주에 대해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특히 인간 자신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다시 말해, 인간은 단순히 수학적인 사물-또는 공식-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슬픔을 안겨줄지라도. 최악의 형태에 있어서 이것은 단순히 신비주의에 불과하며, 합리성을, 최종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오만한 자기중심주의...완전히 반대되는 입장-궁극적인 실재는 세상을 창조하셨던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입장-으로 되돌아가 그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고 우리를 지적인 해답의 자리로 되돌려 주며 갑자기 문을 열어준다. 그것은 단지 해답을 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 수 있고 숨쉴 수 있으며 기뻐할 수 있는 우주 안으로 우리를 다시 놓아준다. 만약 현대인이 정직하기만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붕괴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이론이다...”
Open
🔥🔥🔥
187
이 책이 주로 다루고 있는 신학 분야인 “조직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주어진 주제에 대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분야라는 것이다.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한다면, 조직신학은 성경을 하나의 완성된 계시로 보는 방법론적인 성경연구이며 이는 성경을 펼쳐진 계시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구약신학이나 신약신학 그리고 성경신학 등의 분야와는 구별된다.
Open
🔥🔥
23
신학적인 활동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그가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성경 안에 계시하는 진리를 논리적이고 일관된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고자 애쓴다는 점에서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Open
🔥🔥
27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음에도 성경의 연구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으신다...반드시 신학에 참여해야 한다...요약하자면 교회의 제일의 관심사는 신학에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신학이 옳은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정통적인가 아니면 보다 적절한 표현으로 그것은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Open
🔥🔥
31
신학자는...진리로부터 벗어난 예전의 역사적인 이탈을 설명해야 할 뿐 아니라...참된 교리를 공격하는 모든 오늘날의 이단적 주장을 물리쳐야 한다. 조직신학의 과업과 관련하여...동의한다...오늘날의 이슈와 용어의 관점에서 교리들을 해석해야 하고...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관점들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Open
🔥🔥
3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유오한 인간적 증언이며, 성령님께서는 성경이 아니라 “신앙”을 감동하심으로 “그리스도 사건”을 우리 안에서 실존적으로 다시 일으키시는 것이다. 실제로 “영감되는”것은 믿는 신자이다. 위의 주장은 전형적인 신정통주의의 교리적 선언이다...칸트적 구분의 영향...칸트는 주장하기를 현상적인 영역 즉 눈에 보이는 세계는 순수 이성의 통제를 받는 반면, 본체적인 영역은 하나님, 자유, 신앙의 영역으로 그것은 “실천”이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에 따라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마치 접선이 원과 접하는 것처럼 영원이 시간과 “접촉”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절대로 시간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이러한 반론에서는 성경을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결점 있는) 기록으로 보며 절대로 성경 자체를 계시로 보지 않는다. 계시는 언제나 일반적인 역사의 바깥에 있는 비언어적이고 직접적인 신의 현현이며, 종교적 진리는 언제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진리이다.
Open
🔥🔥
49
신정통주의가 종교적 지식에 대한 자신의 요구를 변호하고자 제기하는 인식론적 기반에는 “신앙의 도약”을 주장하는 신학이 갖고 있는 모든 변증적 약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모든 비언어적인 종교 경험에 있어 처음부터 존재하게 되는 철저한 주관주의와 비합리성이라는 약점이 있다. 종교적 인간 실존이 신정통주의의 인식론적 관점을 지지하게 된다면...어떻게 해서 그는 그것(비언어적이고 주관적인 종교적 만남)이 참된 것이고, 거짓된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는가? 어떠한 근거로 그는 자신의 비언어적 종교 경험에 대한 ‘언어적’ 설명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또한 누군가 그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Open
🔥🔥
54
1940, 1950년대의 급진적인 불트만주의는 신정통주의의 인식론을 자신들의 논리적 결론에까지 끌고 나가 신약 성경의 예수를 “비신화화”함으로써 예수에 관한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발견할 가능성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는데, 사실상 이것은 신학을 하이데거주의자들의 실존주의 인류학으로 변형시킨 것이나 다름 없었다...그리스도는 실체가 없는 “환상”이고, 십자가는 단지 “상징”에 불과하며, 부활은 사람들이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고 구원을 갈망하는 실제 역사에서가 아니라 “근원 역사”에서만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복음에는 어떠한 “내구력”도 있을 수 없다.
Open
🔥🔥
55
디모데후서3:16...최소한 바울에게 있어 “모든 성경”은 구약 성경을 의미했다...그러나 바울이 “모든 성경”이라는 전문적인 범주 안에 그 자신의 것을 포함한 신약 문서들을 기꺼이 포함했었을 것이며, 또한 실제로 거의 그렇게 했다는 정당한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을 썼을 때 바울의 지시와 다른 것을 하라는 성령의 승인을 받았다고 주잫아는 자들에게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 7:40)라고 비꼬며 주장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신이 사도로서 기록한 것드링 성령의 감독 아래서 된 것이라는 인식을 표현한다.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라고 썼을 때, 바울은 그에게 임한 성령님의 감독하시는 영향력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5:18에서 바울은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쓰는데, 그는 계속해서 신명기 25:4과 누가복음 10:7 둘 다를 인용한다. 이것은 바울이 누가복음을 신명기와 동등하게 영감된 “성경”으로 보았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워필드는 그것이 후자-하나님께서 그 자신으로부터 ”성경을 불어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었으며 그의 결론은 일반적으로 학문적인 견해가 되어 왔다.
Open
🔥🔥
75
워필드...”하나님 자신만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도구들을 사용하신 장본인으로서 자신의 메시지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그 도구들을 적절하게 배치해 오신 분이시다...인간의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 전해진 메시지가 말해지는 언어에 의해서 적어도 그 형태에 있어서는 조건이 형성된다는 것이다...그 언어를 통해서 그분은 메시지를 전달하시지만 그분은 그것을 완전하고 온전하게 통제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언어의 격조의 개성과 발음 양상으로부터 메시지가 변질되지 않고 그 언어에 의해서 순전하게 말씀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선지자들의 메시지에 찍힌 얼마간의 개성적인 표현들은 이런 메시지들이 인간의 언어로 말해진다는 일반적인 사실의 한 부분일 뿐이며, 그런 일반적인 사실이 그 메시지들의 순수성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직접적인 교통이라는 것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Open
🔥🔥
83
신앙고백서가 성경의 필요성에 대한 그 교리를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다음의 두 선행 조건, 즉 첫째, 일반 계시의 불충분성과 둘째, 특별 계시의 중단이라는 선행조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일이 중요하다...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지자와 방언하는 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누군가 믿는다면, 동일하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의 말씀을 얻기 위해서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오직 성경이라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Open
🔥🔥
104
아타나시우스는 유세비우스가 나누었던 수용된 책과 논박된 책 사이의 구분을 없앴으며...유세비우스의 정경 가운데 27권의 책의 목록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 이후로 교회의 정경은 사실상 결정되었고 4세기가 끝나가기 전에 제롬과 어거스틴의 지도 아래에서 교회는 그것의 만족에 관한 모든 정경적인 의문점을 해결하였다. 그에 따라 A.D.397년 제3차 카르타고 공의회는 “정경인” 책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읽혀져서는 안 된다고 요청하였고 그때에 오늘날 수집된 27권의 신약 책들을 신약 정경으로 확증하였다...요약하면 신약 정경에 관한 그러한 점으로부터 “문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논거”가 있었다...어떤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신약 성경의 구체적인 목록을 주시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섭리적인 인도하심 아래에서 교회가 책의 수와 “목록”을 올바르게 입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결괒거으로 이 “사도적 전승”은 이러한 오류 없는 기초와 증언으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교회의 정신 안에서 그것 자체를 인증하고 확정하였던 것...1,600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정경의 종결을 지지하는 강력한 정황적인 논거...요약하자면 27권의 신약 정경의 형성은 인간이나 심지어는 교회가 한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이 홀로 일하셨던 사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Open
🔥🔥
112
이처럼 구약 성경과 더불어서 신약 성경책들은 새 언약 공동체를 형성하고 체계화하며 그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명령하는 “조약 문서”로서의 기능을 처음부터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교회 안에 존재했던 조약-정경으로서의 신약 성경이 교회를 형성했지 교회가 신약 성경을 형성한 것은 아니다. 이는 교회가 정경을 형성하고 결정했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에 반대하였던 종교개혁의 인식을 확증해주는 것이다.
Open
🔥🔥
118
성경 말씀을 듣고 성경에 무오성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진리이자 성경 무오성의 원천인 그분께 무오성을 돌리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갖게 되는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지식의 원천은 성경이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성경 어느 곳에 오류가 있다면...성경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일은 진실로 위험한 것이 되는데...우리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성경의 그리스도와 성경 자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유지시키는 것이며, 성경이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요14:6)에 의해 영감되었기 때문에 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Open
🔥🔥
122
성경은 그것의 권위의 문제와 관련하여서 이 세상의 어떠한 변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는 본질적이며 처음부터 타고난, 즉 스스로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의 권위는 결코 인간적인 증언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았다...”가톨릭교회의 권위가 나를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서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어거스틴의 유감스러운 언급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기독교강요] 1권 7장 3절에서 칼빈이 어거스틴의 논평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을 참고하라)
Open
🔥🔥
123
번역된 성경들이 저자의 원래 의도를 갖고 있는 한 동일한 정도로 이러한 번역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권위를 갖고 있다고 단언하는 데 있어 우리는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원본의 권위가 본래적이고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인 반면 번역본들의 권위는 파생된 것이다. 번역본들이 영감된 원본을 복사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것들을 “영감된 성경”이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오직 원본만이 직접적으로 영감되었고 그로 인해 무오하다. 원본에 대한 사본과 번역본들은 직접적으로 영감되지는 않았기에 다양한 종류의 오류를 갖고 있을 수 있다. 본문비평이라는 분야는 하나의 복사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본문을 옮기는 가운데 필사자들의 비의도적인 실수나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필사자들의 의도적인 노력으로 인해 이문(variant readings)이 발생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원본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오한 원본과 오류 있는 사본을 구분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시도가 편향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오류가 있는 사본들이며, 사본에 있는 오류들이 맨 처음 원본에도 존재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신학적인 이유로 인해 사본의 단계에 나타난 모든 본문상의 오류들이 원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진리의 하나님...
Open
🔥🔥
144
자신의 [조직신학개론]에서 반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인간적 서술은 하나님께서 그전에 해석하신 것에 대한 유비적인 재해석이다. 따라서 어떤 계시적 진술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불가해성이 교육되어야 한다.”...자기 특유의 존재론적 시각으로 인해 반틸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로 전해진 모든 언어적 계시는 필연적으로 “의인화된 것”일 거라고, 다시 말해서 피조물의 제한된 이해력의 수준에서 이해되기 위해 그것은 “인간적인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틸은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록 사람들의 지식이 그분 자신을 친히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일 뿐이라 하더라도-즉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과는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결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조명하시는 능력을 통한 위와 같은 신의 자기-계시는 사람들 안에서 “참된”하나님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아마도 반틸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그분의 자기-계시로부터 이끌어 낸 인간들의 지식이 비록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동일한 것이 아닐지라도 창조주께서는 그러한 인간들의 지식을 기꺼이 “참된” 지식으로 간주하신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인간들의 유한성으로 인해 창조주께서 자신의 계시를 피조물의 제한적인 이해력에 맞게 조정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향한 하나님의 언어적 계시가 “피조물 중심적”(즉, “유비적”)이기 때문에...이러한 모든 주장에 반대하여 클락은 반틸의 입장이 인간의 전적인 무지로 이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만약 하나님께서 지닐를 소유하시고 인간은 단지 유비만을 갖고 있다면(여기에서의 “유비”는 어떠한 동일한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 것) 인간은 진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결론이 된다...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어떤 것에 대해 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과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 사이에 일치하는 영역이 존재함을 주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프란시스 쉐퍼...”비록 철저하지는 않더라도 참된 지식”을 가질 수...따라서 성경이 참된 지식에 입각한 구원의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에(참고, 롬10:13-14),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일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기반이자 유일한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낼 수 있는 모든 언어학적 또는 계시적 이론에 대해 교회는 활발하게 반대해야 한다.
Open
🔥🔥
152
코넬리우스 반틸은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유비적일 뿐이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 진리는 결국 역설적일 것이라고 다시 말해 모든 기독교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모순된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선언하기조차 한다...”우리의 지식은 유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임에 틀림없다...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표면상으로 모순적이다...필연적...최대한...함께 연결...논리적...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유비적인 체계만을 갖게 될 거라고 기대한다.”...만약 성경이 때때로 그 진리를 양립할 수 없는 용어로 설명한다면, 처음부터 그것은 반틸이 위의 인용문 마지막 부분에서 요구하는 조직 신학에서의 시도조차 무익한 것으로 비난한다. 왜냐하면 조화롭게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확고하게 저항하는 양립불가능한 역설들을 하나의 체계로 축소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일련의 “불연속성들”과 함께 신학적으로 사는 것에만 만족해야 한다.
Open
🔥🔥
160
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모든 지적 노력을 기꺼이 소유하며 그러한 지적 노력의 근거가 되는 신적 계시가 본질적으로 일관된다고 즉 모순적이지 않다고 솔직하게 주장하는 기독교적 합리주의이다...자신이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거짓말을 하시지도 않고 정말로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다(참고, 딛1:2;히6:18). 따라서 하나님께서 합리적이고 일관적이며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진실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록해주신 명제적 계시-성경-또한 필연적으로 합리적이고 일관적이며 참된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한다...성경으로부터 역설이 없는 조화로운 신학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은 단지 조직신학의 종말뿐 아니라 살아계시고 합리적인 한 분 하나님의 진리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원하는 모든 신학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Open
🔥🔥
167
현대의 비평적인 사상에서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소위 두 개의 창조 기사들을 고대 바빌론의 ‘에누마 엘리쉬’와 유사한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 기원론으로 즉 종교적 신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세속주의적 경향에 저항해야만 하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창세기의 처음 장들이 역사적으로 완전한 것임을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의도되었음을 입증하는 내재적인 증거가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존재한다...’와우’라는 연속 동사를 사용하고 목적격과 “관계”대명사를 자주 사용...저자(모세)가 초창기 지구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이야기로서 이러한 장들이 취급되기를 의도했다...창세기1-11장에는 64개의 지리적 용어, 88개의 인칭 명사, 48개의 보통명사 그리고 적어도 21개의 증명할 수 있는 문화적 용어들...저자가 묘사하였던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이지 실재의 다른 차원이나 정신적인 개념에 속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창세기 저자는 장르상 두 부분으로(1-11장은 신화, 12-50장은 역사로) 나누는 방법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 창세기 11장과 창세기 12장 사이의 단절을 분명코 알지 못했었다는 많은 구약 학자들의 주장은 인정되어야 한다...역대상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들은 아담을 최초의 인간으로 본다...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선조들의 이름들은 역사적으로 불확실하고 신뢰성이 없다고 인정해야 할 어떠한 암시도 그 족보들은 제공하지 않는다...우주의 기원에 대한 고도로 제한되어 있고, 매우 압축되어 있으며 비전문적인 이야기 식의 설명을 주석적, 해석학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몇몇 세부적인 문제들을 해석할 때 어려움에 부닥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적인 어려움들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무신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현대 해석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과학적, 철학적 어려움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다.
Open
🔥🔥
178
신학자는 그의 교회의 교리와 또한 그 자신이 제안하는 조직적인 체계가 어떤 관점에서는 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로 그가 어디에선가 오류를 찾는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수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로 누락된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 빠뜨려진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개혁 신학자들에게 신학적 과업의 이러한 측면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간다”라는 모토에서 찾을 수 있다).
Open
🔥
32
루이스 벌코프...”선지자들의 말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3인칭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하다가, 잠시 후에는 변화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이 1인칭으로 바뀌어 계속된다...어떠한 중간 매개체 없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사19:1,2;호4:1-6;6:1-4;미1:3-6;슥9:4-6;12:8,9). 이처럼 선지자의 말은 어떠한 표면적인 전환 없이 곧바로 여호와의 말로 바뀐다. 그 둘은 단순하게 섞이며 이로써 하나임을 증명한다.” 구약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몇몇 선지자들에게 자신이 주신 계시들을 기록하여 보존하라고 명백히 가르치셨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공한다...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느꼈던 거룩한 충동을 표현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라고 했다...후대 선지자들은 이전 선지자들의 글들을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말씀으로 인식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하였다(욜2:32과 옵17;암1:2과 욜3:16;렘26:18과 미3:12;렘49:14-22과 오바댜 곳곳;겔14:1420;단9:2과 렘29:10;슥7:12;말4:4).
Open
🔥
45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향한 언어적 또는 명제적 계시 개념에 반대하는 두 번째의 현대적 주장은 언어라는 것이 인격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부적당하며 초월적인 실재들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주장은-최근의 실증철학적 회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하나님에 대한 표현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동방 종교적 사상(예, 도교)에도 표현된다.
Open
🔥
56
존 프레임...”마찬가지로 성경 역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포괄성에 대한 주장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또한 포괄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해서 그러한 포괄성의 결핍이 무오성을 반대하지도 않는다...’정확하지 않지만 참된’ 문장들...언어가 결코 ‘전체적인 진리’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그러한 설명에 근거하여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정통적인 관점의 어떠한 요소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
Open
🔥
59
바울은 그가 사도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아시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그 하나님의 성령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생각들뿐 아니라 그 생각들을 구체화하는 바로 그 단어들까지도 가르치셨다(”성령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고전2:12b). 바울은 “우리는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신(말)로 말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말)’로 설명하느니라”(2:13저자번역)라고 말한다...요약하면 이 구절에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그의 능력에 있어 그가 선포한 생각과 그 생각들이 구체화된 바로 그 단어는 궁극적으로 그의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성령님의 생각이자 단어였다는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서의 바울의 진술은 “축자적 영감”을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타당하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바울이 성령님께서 가르치신 단어들로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하면서 글의 형태로 기록하였다면 동일하게 그가 기록하였던 것은 기록된 형태로된 성령님의 생각과 말씀일 것이다.
Open
🔥
73
딤후3:16-17...”모든 선한 일”에 변증학의 일이 포함된다고 나는 제시하고 싶으며 그리고 바르게만 된다면, 변증학이 성경의 계시된 진리를 전제할 것이며 나아가 성경의 가르침에만 근거한 그것의 주장은 그리스도인 입장의 진리를 위한 명백한 증거로서 기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Open
🔥
79
앙리 블로허...”성경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는 일관성이 높게 평가되었으며 어떠한 가르침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믿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진리는...영원성, 변치않는 영구성과 일치한다(시119:160)...그분의 모든 규례들은 그 의로움에 있어서 모두 하나가 된다(시19:9)...예수님꼐서 재판당하실 때의 거짓 증언들에서 볼 수 있듯이(막14:56,59), 모순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책망받아야 한다(롬16:17;딛1:9). 기준 자체가 여러 가지 모순되는 신학들을 동시에 끌어안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만약에 성경이 일관되다는 전제가 사라진다면, 우리 주님께서 (그리고 유사하게 그분의 제자들이) 논쟁이 있을 때 성경에 호소했던 모든 논리는 즉시 붕괴해 버릴 것이다. 심지어는 사탄에 대항하심에서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일관성에 의존하시고, 성경의 왜곡된 사용을 막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신다...성경을 기록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은 일관성을 존중했다. 그들은 자명하게 그것을 신적 계시의 속성으로 돌렸다.”
Open
🔥
87
성경이 우리들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바울의 명쾌한 주장이 의미하는 바에 따르면, 비록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16:16)는 말씀처럼 문화적인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 가르침들과 그것의 적용에 있어서 문화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가르침들을 구별해야 한다 하더라도 성경의 교훈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신약의 시대와 우리들 자신의 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문화적 차이를 허용하려는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
Open
🔥
99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의 교회를 위해 “장차 있을 모든 복음전파를 위한 원천과 기준” 즉 사도의 직무가 될 “공식적인 권위 체계”를 세우셨으며(막3:14;행10:41;엡2:20), 그분은 사도들이 말하고 기록할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미리 인증해 주셨다. “요한복음 14:26...성령님이 복음서의 제작 과정을 감독하실 것이라고 함축적으로 약속....” 하나님께서는 친히 적당한 때에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하심으로써 구속적, 역사적 계시의 신약적 수단인 이 사람들을 자신의 대변인으로 인증하셨다(행14:3;고후12:12).
Open
🔥
108
무오주의자들은 성경 안에서 나타나는 여갓와 관련된 모든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역사적 오류가 성경 안에 존재한다고 입증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우리는 성경이 그것 자체에 대하여 교훈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며 성경 자체에 대한 교훈적인 진술의 관점에서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현상을 연구해야 한다. 즉 우리는 성경의 현상들에 대해 귀납적으로가 아니라 전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Open
🔥
120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대한 사실 이하의 것을 전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사실 이하의 것을 전제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Open
🔥
124
데이비드 존스는, 정경이 완료됨에 따라 예언의 은사와 가르침의 은사가 하나로 합쳐졌음이 분명하며 성령님께서 직접적으로 영감하시는 뚜렷한 경험이 기록된 말씀 안에서 그것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사역에 자리를 양보하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시한 바에 의하면 요엘의 예언(2:28-32)은 강림 사이 기간 동안에도 여전히 진행되지만 신약 예언자들의 영감이 중단되었다는 점에 있어 예언의 임무도 중단되었으며 그들의 가르치는 기능이 계속된다는 점에 있어 예언의 임무는 가르치는 임무로 융합되어 오늘에까지 계속된다.
Open
🔥
137
어거스틴...나는 정경적인 성경책에만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성경 저자들 중 그 누구도 글을 쓸 때 어떠한 오류도 범하지 않았다는 점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기록에 있어서 진리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가 혼란스러워진다면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고 필사본이 틀리거나 번역자가 자신이 들은 것을 따르지 않았거나 아니면 나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Open
🔥
146
만약 역설이 조화될 수 없는 모순들로 이해된다면, 그것을 비합리적 시대의 산물로 인식하면서 기독교 진리의 적합한 입장에서 유일한 해결은 그 역설을 부인하는 것이다...수사학적, 문학적 도구로서 역설을 사용...그러나 하나님의 진리 중 어떤 것이 언제나 인간에게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은 거부되어야 한다. 특히 신앙의 주요 교리들-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성, 은혜 교리 등-이 올바르게 선포되기 위해서는 모순적인 구성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선포되어야 한다...성경의 진술들은 인간에게 모순적인 동시에 여전히 참되다고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와 명제적 계시가 그 가르침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기반 위에 놓이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자신의 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합리적 본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이셔서 두 분 모두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은 일관성이 있고 모순적이지 않으며 그 말씀 중 어떠한 것도 계시의 과정에서 바뀌지 않는다.
Open
🔥
164
임마누엘 칸트는 전적인 합리주의와 전적인 경험주의의 함정을 피하려 했으며, 다른 하나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때 둘 중 어떠한 것도 자신의 지식 요구를 옹호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는데, 자신의 기념비적인 작품 [순수 이성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주장하였다. 비록 인식 주체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본유적 개념뿐 아니라 12개의 구체적인 사유 범주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는 “본체적인 세계”-우리의 경험과 떨어져 있는 실제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 즉 감각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또한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인식대상 없는 사유”는 “비어 있는”상태이거나 “공허한”상태일 것이다. 반면 만약 인식 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백지 상태인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는 본체적인 세계에 대한 정보들만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개념 없는 인식 대상”은 “맹목적”이거나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로 인해 칸트는 지식의 습득과 축적에 있어서(형식을 제공하는) 합리주의와 (”재료”를 제공하는) 경험주의의 몇몇 요소를 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Open
🔥
172
헤겔과 키르케고르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보다 최근에, 많은 철학자들은 어떠한 것에 대한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실패했음을 깨달았고, 이러한 실패가 발생한 원인은 이전의 사상가들이 합리적으로(또는 반정립적으로) 사유했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그러므로 이러한 철학자들은 비합리성을 위해 합리성을 포기하였으며, 의미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고 지금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진리는 상대적이며 삶의 의미는 순간적인 존재의 의미를 제공해 주는 어떤 것으로의 “신앙의 도약”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모든 주장을 피하며 성경의 사실과 명제적 내용 안에 은혜로 주어져 있는 인식론을 지지한다...”아르키메데스의 기점”...성경 안에 그리고 성경에 의해 나타나 있음을 믿는다...요컨대 그들은 성경에서 스스로 증명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추론과 지식을 위한 인식론적 기반으로, 심지어 이성이나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추론을 할 때조차도 자신들의 인식론적 기반으로 삼는다.
Open
🔥
174
우연은 어떠한 것의 원인일 수가 없는데 이는 우연이 하나의 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우연은 단지 수학적인 개념일 뿐이다...세이건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가 -당신과 나를 포함한- 어떤 것을 선택했으며 비지성적인 존재로부터 우리가 발생하였고 비인격적인 존재로부터 우리가 나타났다는 점을 믿으라는 것이다.
Open
🔥
184
성경적 창조론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주와 우리 자신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위한 지적 필요를 다루어 만족시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우리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정의해 주며 우리들을 매우 가치 있고 존엄한 상태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절대적인 윤리를 위해 필요한 유신론적 배경을 제공한다. 창조 교리가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영역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질 것이다.
Open
🔥
186
리고니어(Ligonier) 변증학자들은 그들의 고전적 변증학(Classical Apologetics)에서 존재론적 논증을 발전시켜 놓았는데, 그들의 주장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들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추종하여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우리에게는 존재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나 비존재에 대한 개념은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결코 있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존재가 어느 때 또는 어디에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따라서 영원 무한한 이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궁극적 증거는 그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결론에 의하면 이 필연적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지적할 수 있는 가장 초보적이고 단순한 사실은 그들의 주장의 핵심인 “비존재의 개념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존 프레임은 또 다른 반대 입장을 이렇게 제기했다. “무한한 존재가 존재할지라도, 존재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유한한 존재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만일 ‘존재’가 신적이라고 하면 유한한 존재들은 그 신적 존재의 일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별다른 이의가 없다고 하면 그 논증은 범신론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 논증에 따르면 범신론적 신에게 속하는 ‘무한성’, ‘영원성’, ‘편재성’ 등과 성경의 하나님에 대하여 계시된 전혀 다른 속성들 간에 구분을 지을 수가 없다.”
Open
🔥
200
COUNT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