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Search
메모
🔥
페이지
예정론을 둘러싼 논쟁이 한층 더 혼란스러운 것은 교회 역사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이 의견 일치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이것은 신자끼리의 논쟁, 곧 경건하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과거의 위대한 교사들이 어떠한 견해를 보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개혁주의의 견해 :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반대 견해 :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필립 멜란히톤, 존 웨슬리, 찰스 피니] 마치 내가 속임수를 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고전적인 기독교 학문계의 거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상가들이 개혁주의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이, 우리가 감히 무시해 버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정한다...그들에게도 오류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마땅하다. 현대의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찬성과 반대가 한층 더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개혁주의의 견해 : 프란시스 쉐퍼, 코넬리우스 반 틸, 로저 니콜, 제임스 보이스, 필립 휴즈], [반대 견해 : C.S.루이스, 노먼 가이슬러, 존 워익 몽고메리, 클라크 핀녹, 빌리 그레이엄]...나는 우리 모두가 계속 고민하기를 원한다. 결코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나 단순한 회의주의에서는 취할 것이 없다.
Open
🔥🔥🔥
12
문제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다...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차라리 태어나도록 허용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으로 보일 것이다...철학자들이 제기한 반론은 하나님이 죄악된 피조물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는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가정이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철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은혜까 의무라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은혜의 본질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은 항상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실 권리가 있으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공의를 베푸실 의무가 있을지언정 긍휼을 베푸셔야 할 의무는 결코 없으시다...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죄인을 위해 구원의 방법을 마련하실 만큼 충분히 사랑하신다고 주장한다. 오직 택한 자들에게만 구원을 한정시키는 칼빈주의의 하나님은 사랑이 부족한 분처럼 보인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칼빈주의 견해가 칼빈주의 견해에서는 구원받지 못했을 수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타락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최종 결정이 타락한 죄인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면 어느 누구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모두 버려야 할 것이다.
Open
🔥🔥🔥
30
하나님이 일부를 택하셔서 긍휼을 베푸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축복을 베풀지 않으신 것은 공의롭지 않아 보인다. 이 문제를 다루려면 매우 친숙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죄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 많은 긴간 가운데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부에게 긍휼을 베풀기로 결정하셨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공정한 대우를 받은 것뿐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긍휼을 입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공의로운 대우를 받은 것이다. 아무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긍휼을 공의가 아니다. 그러나 불의도 아니다.
Open
🔥🔥🔥
36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의 견해를 이해하려면 원죄에 대한 개혁주의의 견해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예정과 원죄의 문제는 함께 서든지 아니면 다 같이 무너지든지 둘 중 하나다. 개혁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따른다...타락 전에 아담은 두 가지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즉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무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무능”(inability to not)이라는 개념은 약간 혼란스럽다. 이중 부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라틴어로 표현한 바에 따르면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non posse non peccare)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타락 후에 인간은 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 없이 살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도덕적 무능이 이른바 원죄의 본질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 죄에 대한 속박이 풀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살리심을 받은 후에는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한 번 가지게 된다. 하늘나라에서는 죄를 범할 수 없는 (무)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Open
🔥🔥🔥
66
타락 연합론은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의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 견해는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자로 행동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앞에 제시하신 시험을 통하여 모든 인류를 시험하셨다...우리의 대표자를 선택하신 분은 조지 왕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표자를 완전하게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오류가 없다. 내가 대표자를 선택한다면 잘못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사람을 잘못 선출하여 나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담은 오류 없이 나를 대표하였다. 아담에게 오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타락 문제와 씨름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안하는 가정은 그곳에 있었더라면 다르게 선택했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가정은 결코 불가능하다...나보다 하나님이 내 대표자를 선택하시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Open
🔥🔥🔥
93
대칭적 운명은 예정에 대한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견해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초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부른다. 나는 오히려 이것을..”반칼빈주의”(anti-Calvinism)라고 부르겠다. 칼빈주의가 확실히 이중 예정의 견해를 가지긴 하지만,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이중 예정은 대칭적 운명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니다...적극적인 작정은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활동과 관계된 것이다. 소극적인 작정은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관계된 것이다...초칼빈주의가 지닌 무서운 오류는 하나님이 죄를 강요하신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실성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우리는 이중 예정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 마음속에 믿음으로 역사하셔서 택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유기된 자들에게 공의를 베푸신다. 여기에는 대칭이 없다. 한 집단은 긍휼을 받고 다른 집단은 공의를 받는다. 누구도 불의의 희생자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부의하시다고 불평할 수 없다.
Open
🔥🔥🔥
146
예수님은 유다와 대화를 마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 그와 달리 베드로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예수님은 “돌이킨다면”이라고 하시지 않고 “돌이킨 후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돌이킬 것을 확신하셨다. 베드로의 타락은 근본적이고 심각한 것이었지만 완전하고 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가 돌이키리라는 예수님의 확신이 베드로의 능력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사탄이 베드로를 밀처럼 까부를 것을 알고 계셨다. 사탄에게는 베드로가 “만만한 상대”, “손 쉬운 상대”였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확신은 그분 자신의 중보 능력에 근거했다.
Open
🔥🔥🔥
189
전도는 우리의 의무다. 하나님이 전도를 명하셨다. 이것이면 더 이상의 논란을 끝낼 만한 이유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전도는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 역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역, 곧 구속 사역에 참여하도록 허용하셨다...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위한 구원의 목적을 미리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위한 방편도 미리 정하셨다. 하나님은 구속을 이루시기 위한 방편으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그분의 거룩하신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손가락을 사용하셔서 구름 위에다 복음을 기록하실 수도 있다. 또한 친히 음성으로 하늘에서 복음을 전파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들을 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쓰임받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Open
🔥🔥🔥
222
아주 기본적인 개념으로 볼 때 예정이란, 우리가 도달하기 전뿐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하늘나라나 지옥)를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정론은 우리의 궁극적 운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영원 전 곧 우리가 생존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멸망에 버려두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선택하셔서 구원받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축복에 이르도록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도록 버려두기로 하셨다.’
Open
🔥🔥
18
예정과 관련하여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선택받은 자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그들이 구원받을 것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하신다고 가르친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그리스도께 초대를 받으며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버려두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쟁의 핵심이다. 예정과 관련하여 비개혁주의는 타락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칼빈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셔야 할 만큼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비개혁주의의 견해에서는 인간의 궁극적 운명을 위한 결정권을 모두 인간의 능력 안에 둔다.
Open
🔥🔥
32
왜 하나님은 일부 사람만 구원하시는가?...이 질문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만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 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누구나 구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성경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신적 특권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Open
🔥🔥
35
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요구할 수 없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하시는 긍휼을 베풀길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결정에 순복해야 할 것이다...실제 문제는 왜 하나님이 일부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시는가다...하나님은 유다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는 긍휼을 베푸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나 공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배워야 한다.
Open
🔥🔥
37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우리는 여기에서 “아니하면”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단어를 본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필요한 선결 조건을 강조하신다. 그 중요한 선결 조건은 영적 거듭남이다...비개혁주의의 견해는 타락한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를 선택한 후에 거듭난다고 본다. 이런 견해에서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셈이다...아직도 육에 속해 있어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그리스도께 향할 수 있다면 거듭남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이 비개혁주의 견해의 치명적인 결점이다. 비개혁주의 견해는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 곧 육의 도덕적 무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 핵심은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는 명제다...비개혁주의 견해에서는 타락한 인간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요한복음 3장 16절을 주요 증거 구절로 삼는다...이 구절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누가 믿을 것인지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개혁주의자와 비개혁주의자 모두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으리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누가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견해가 다르다.
Open
🔥🔥
74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한 가지라도 복종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도 바울이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 될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지만 그 욕망이 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 육신에 남아 있는 동안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한 소원이 없다. 그는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바를 선택할 수 없다. 그의 타락은 심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유효한 은혜만이 그를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
Open
🔥🔥
78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저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어떤 사람들은 저주로 예정하시고 난 뒤에 이들이 확실히 멸망하도록 타락을 결정하셨다고 주장한다...”초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모독이다. 이 견해는 칼빈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 것은 초칼빈주의라기보다는 반칼빈주의다...물론 하나님은 타락 이전에 타락이 있을 것을 아주 정확히 알고 계셨으며, 일부를 구속하시기 위해 행동을 취하셨다. 타락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타락을 정하신 것이다. 예정하신 하나님의 은혜까 자비로운 것은 영적으로 죽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던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Open
🔥🔥
100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와 대조적으로 개혁주의에서는 구원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한다...개인의 궁극적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의 선택에 전혀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 물론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먼저 하나님이 택한 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영향을 끼치기로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근거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있다.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의 견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택보다 앞선다.
Open
🔥🔥
141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의 견해는 황금 사슬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을 미리 아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들의 정체를 알고 계셨다. 그들의 개인적 정체가 어떤지 알고 계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미리 알고 계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미리 알고 계셨다. 성경에서 “알다”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한 단순한 지적 인식과 깊고 친밀한 사랑을 구별한다. 이처럼 개혁주의의 견해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모두 내적으로 부르기로 예정하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분께 택함받은 자, 오직 택함받은 자들만을 구원하실 것이다.
Open
🔥🔥
142
우리는 아직도 성경의 관점에서 우리의 구원을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확신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확신이 가능하고 또 그러한 명령을 받았다면 확신을 추구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오히려 확신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Open
🔥🔥
176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선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선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악한 죄를 범하도록 허용하신 것 자체가 선한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신 사실은 선하지만 하나님이 허용하신 그 악은 여전히 악하다. 이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은 완전히 의롭다. 우리가 죄에 참여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하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Open
🔥
29
자율적이어야만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율에는 절대적 자유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그 궁극적 한계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다...하나님도 자유로우시고 나도 자유롭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자유로운 분이다. 내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가 경주를 벌인다면 내 자유가 질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는 내 자유를 제한하지만 내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지 못한다.
Open
🔥
42
항상 그 순간에 가장 강력한 성향에 따라 선택한다는 것은 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선택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결정론과 다르다. 결정론이란 우리가 외부 힘에 강요당하는 사실을 뜻한다...자유의지를 중립으로 보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 이 견해는 욕망이 없는 선택을 내포한다...성경은 우리가 욕망에 따라 선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악한 욕망은 악한 선택과 악한 행위를 낳는다...예수님은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그러므로 의로운 욕심은 의로운 선택을 낳으며 악한 욕망은 악한 선택을 낳는다.
Open
🔥
60
최초의 범죄 때문에 생긴 부패를 교회는 원죄라고 부른다. 원죄는 어떤 특정한 죄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의 상태다. 원죄란 구체적인 죄악 행위가 흘러나오는 죄의 본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본성이 죄를 범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것은 인간의 원래 본성이 아니었으나 타락한 후에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변했다. 이제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Open
🔥
65
도덕적 무능...”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65).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가르침의 첫 번쨰 요소는 전칭 부정(명제의 주어가 나타내는 사물의 전부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일)이다. “누구든지”라는 표현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덧붙이신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이 중요하다. 바로 “올 수 없다”는 표현이다. 이 말은 허용이 아닌 능력에 대한 설명이다. 아마 대부분 can(할 수 있다)과 may(해도 좋다)를 혼동하지 않도록 선생님께 교정받았을 것이다...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오도록 허락받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예수님이 말씀하신 표현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게 해주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수 없다.
Open
🔥
68
예화...하나님이 한 정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해 보자. “네가 오늘 오후 3시까지 이 가지들을 잘라놓으면 좋겠구나. 한 가지 조심해라. 정원 구석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는데, 그 구덩이에 빠지면 혼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 그 구덩이 근처에는 가지 마라.” 그런데 하나님이 정원을 떠나시자마자 그 사람은 달려가서 그 구덩이에 뛰어들었다...정원사는 화가 나서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이 구덩이에 빠졌는데 어떻게 가지들을 자를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여기에 구덩이를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제가 이렇게 곤란한 처지를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담은 구덩이에 뛰어들었다.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그 구덩이에 뛰어들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덩이에 던지신 것이 아니다...구덩이 속에서 아담이 체험한 결과는 그 속으로 뛰어든 데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었다. 원죄도 마찬가지다. 원죄는 아담의 죄에 대한 결과이자 형벌이다...하나님이 우리를 밀어 넣으신 것이 아니다...잘못은 오직 우리에게 있다. 아담이 신 포도를 먹어서 우리가 초라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Open
🔥
10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그러나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전도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요컨대 하나님을 찾는 일은 비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을 것이다. 찾는 것은 신자들이 할 일이다...역설적이게도 일단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그것은 추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보통 찾던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추구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았을” 때는 추구가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심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회심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Open
🔥
113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라는 용어는 잘못되었다...우리가 거절하고 있고 또 거절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보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다. 그 은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유효한 은혜(effectual grace)라 부르겠다...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천지를 창조하신 부르심처럼 능력이 있고 유효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존재하도록 요청하시지 않았다.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다르게 될 수가 없었다. 그 빛은 비추기 시작하였다.
Open
🔥
125
하나님의 예지는 단순히 인간이 택하는 자유로운 결정을 미리 아는 것 이상의 사실이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복음에 반응하고 누가 반응하지 않을지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소극적인 관찰자로서 알고 계신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구를 내적으로 부르셔야 할지 알고 계셨다. 그분은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를 또한 의롭게 하실 것이다.
Open
🔥
139
우리가 누리는 일반 은총의 중요한 요소는 이 세상에서 악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 억제력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경찰, 법률, 여론, 권력 분립 등을 통해 악이 억제되고 있다...물론 하나님은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타락한 인간들의 악한 의도와 성향을 사용하신다. 유다 없이는 십자가도 없다. 십자가 없이는 구속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악을 강요하신 경우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이 악을 이기는 영광스러운 경우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욕망은 하나님의 주권을 위축시킬 수 없다.
Open
🔥
149
알미니우스주의 견해로 보면 아이의 안전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힘에 달려 있다. 그 아이가 손을 놓쳐버리면 멸망할 것이다. 칼빈주의에서 아이의 안전은 그 손을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힘에 달려 있다. 아이가 손을 놓쳐도 아버지가 굳게 붙잡으실 것이다. 주님의 팔은 짧지 않다...놓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이 주어져 있지만 아버지의 손을 굳게 붙잡는 것이 그 아이의 의무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들에게 떨어져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루터는 이것을 “권면의 복음적 활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부지런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Open
🔥
191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알면서도 예수가 마귀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린 신약학자들에게 동의한다...누가 이러한 죄를 범하는가? 바로 마귀들과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다. 몰랐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다...그리스도인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막을 것이다.
Open
🔥
214
COUNT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