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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영선, 김관성
출판사
두란노
출판연도
2016
커버
분야
종교
분야(소분류)
신학일반
신앙생활/영성
추천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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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아직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 가는 것이 가장 큰 벌입니다. 그 자리의 역할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지 않은 자리에 앉히신 것은 좋지 않은 자리의 조건 속에서 만드시는 일입니다. 거기서 좋은 조건을 주셔서 좋은 자리에 앉히신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드실 수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저기를 가려면, 다만 여기와 저기가 구별된 조건과 지위가 아니라 연결된 과정을 통과하여 간 자리여야 합니다. 여기서 저기는 건너뛰거나 승진하여 얻는 자리가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자라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저기입니다. 도달한 것이기보다 여기서 만들어낸 셈이 됩니다.
97
교회가 이것저것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것을 하면 죄고 교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윤리와 도덕에 멈추지 하나님으로 회귀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하는 것은 죄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가 돼야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에서 구체적인 실천은,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순종인가 거부인가를 본질로 해야지, 하나님 없이 하느냐 마느냐는 실천의 문제로 독립돼서는 안 됩니다. 해도 하나님이 없고, 안 해도 하나님이 없다면 왜 그런 논의를 해야 합니까.
34
우리가 일부러 외면하고 주저하고 내일로 미루는 것들이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성일 수 있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을 때만이 아니라, 미뤄 놓는 것조차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일 수 있습니다. 물론 미뤄 놓으면 다음에 두 배로 힘듭니다. (웃음) 그만큼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순서대로 크지 않고 희한한 방식으로 자랍니다. 은혜도, 상처와 좌절도 보상과 결핍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함께 어우러져 인격과 성품과 가치를 구성하게 됩니다.
38
인생은...연극처럼 드라마를 펼치는 것에 가깝습니다.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팀입니다. 그러니 자꾸 비판만 하지 말고 상대와 서로 호흡을 맞춰야 합니다. 화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남을 원망할 줄은 알아도 호흡을 맞출 줄은 모릅니다...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상대가 대사를 할 때 나도 반응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내 대사를 해야 합니다. 설사 상대방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엉망으로 할지라도 나는 내 순서에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니 절대 막 살 수는 없습니다.
40
[오래 살아야 한다는 명백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자세로 삶을 맞이해야 할까요?] 시간이 많으면 역할이 많은 것입니다...몇 살 까지 사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그때까지 어떻게 배역을 소화할 것인가 고심해야 합니다. 마흔까지 살 수 있다면 마흔까지 배역에 충실해야 합니다. 죽음은 전체 영화의 한 요소일 뿐입니다. 전체 줄거리 속에 녹아드는 것이지요...감춰진 삶, 조연으로 사는 일은 예수의 제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은 원망만 하지요.
42
최선이란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훨씬 크고 깊고 넘치십니다...”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실력만큼 하라는 것입니다.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분의 뒤나 쫓아가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느 날 자라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사람을 자라게 하시는 방법은 독특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자라게 하십니다. 물이 바다를 덮는 것이 뭡니까? 물기둥이 치솟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빈자리 없이 모두 물로 채워 가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기능적인 사람, 무엇에 쓸모 있는 독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기능적으로 쓰이는 사람은 수도꼭지이거나 바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다가 아니지요. 우리가 바다입니다.
72
지킬 수 없는 원칙은 차라리 없애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각자의 진실을 확인하고 자기 성찰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이혼의 경우를 보십시오...”이혼은 안 해야 하는 것인데 제 능력이 모자라서 했습니다”하고 본인이 그것을 알고 있어야지, 그것을 누구든 자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견뎠어야 하는 것인데 견디지 못한 것이고, 그것으로도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한 것으로만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고, 잘못한 것으로도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 잘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마음에 갖고 있어야 합니다. 자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문제와 이러한 부분들을 어떻게든 변명하며 책임을 면하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74
[견딤의 이유가 신앙적인 대의가 아니라 그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면, 그 또한 비참한 게 아닌가요?]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개념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신앙입니다. 오늘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오늘을 말합니다...예수님은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는 권력을 가지는 것, 즉 권력 싸움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권력 구조 가운데서 피지배자의 입장으로, ‘하나님 아버지 경배’라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싸움의 역사적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인생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78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현존과 통치를 느낄 수 없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인식 자체가 불순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해 내에 붙들어 매려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2차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이나 노예제도나 인류가 저지른 만행 때문에 기독교를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건 아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다.” 이런 말들이야말로 깊이 간 것 같으면서 일어난 일이 그것으로 끝인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전부가 아닙니다. 역사란 잘잘못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인데,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는 끝나 봐야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끝나는 날입니다...돌연히 찾아옵니다. 역사가 만들어 내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끝나는데, 그것이 개입에 의해 끝날 수 있는 것은 그전에 역사가 하나님의 개입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다”라고 끝을 내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고 주류라고 여겼던 것이 주류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셨던 하나님의 진짜 역사가 분명히 나오는 것입니다.
84
인간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매우 깊고 심오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보상을 못 받아도 좋다는 겁니다. 신앙관계를 이해관계로 전환해서 그에 대한 보상을 보이는 것과 작은 것으로 삼게 되어 교회의 가치, 신앙의 가치가 무너진 것입니다.
98
전기가 끊어진 냉장고 속에 넣어 둔 생선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냉장고가 잘못이 아닙니다. 전기가 안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과 단절된 것은 이렇게 다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근원적인 것을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해는 둘째 치고 감각 없는자가 된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비유할 때 등장하는 최고의 저주의 병은 나병입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인생이 고달프다고 느끼면 그것이 은혜입니다...[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각이 와야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이 오면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세상은 그 아픔을 체념하게 만들고,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 중간에 교차합니다.
121
사랑은 결국은 텍스트로 엮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가 독립된 인격, 취향, 성격, 개성을 가지고 화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그래서 둘이 다를수록 기가 막힌 것입니다...친구이든, 배우자이든, 자녀이든 그 사람과 있으면 방해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음을 만들기 위해서 연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31
십자가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고, 하나님이 기적을 만드는 손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누구 하나 보는 사람 없다고 대강 해서는 안 됩니다...어느 때나,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불리한 조건과 경우에 있을 때조차, 원망할 때조차, 불평할 때조차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진지함과 자기를 보고 있는 이웃들 앞에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가장 고통스러울 때도 위대해집니다.
139
내가 살아 숨 쉬고, 내 발로 가는 모든 자리와 내가 당하는 모든 정황에 신학과 신앙, 그리고 이기심과 비겁함이 범벅이 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실패하는 것까지도요...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 것들이 누적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승리의 자리에 오를 수도 없고, 다른 길도 없습니다...실패, 기만, 도피, 체념, 절망 등이 신앙을 완성할 때 들어 있어야지, 순수한 신앙만 남는 것은 추상명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152
현시대를 개탄하고 비난하는 것은 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느냐 각성을 일으켜서 전체 기독교를 휘저으려고 하는 다수주의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수가 지켜 낸 게 교회라고 역사가 말해 주지 않습니까.
155
[교회에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현상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생명을 맡은 곳입니다. 물이 있으면 생명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꽃 피는 오뉴월에 얼마나 치장을 멋있게 하고 세련된 홍보를 돌리느냐는 본질이 아닙니다. 물이 나와야 합니다. 물이 흐르면 생명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할 일은 하나님이 세우신 곳에서 하나님의 생수를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구원과 용서와 회복과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155
유진 피터슨이 말했지요. “세상에 기적은 있다. 단지 당신이 원하는 기적이 아닐 뿐이다.” 기적은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기 예수가 누운 말구유 같은 것입니다. 예수가 누우니 말구유도 오성급 호텔만큼 고급스러워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는 해당 시대에 가장 평범한 문화, 경제, 정치, 사회 수준을 성실히 반영하는 동시에 구별될 만큼의 차이를 가지면 됩니다. 세상에 비해 너무나 약소한 교회를 보면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입니다. ‘저렇게 약소한 주제에 뭘 하려는 걸까?’...교회는 그런 것에 일일이 답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교회의 소중함과 독특함과 가치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157
인간의 본질적 내용이라면 인간성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명분에는 도덕, 윤리, 덕목, 능력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런 것들을 지키면 우월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월감이나 자랑 대신 감사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내용으로 나를 만들어 주셨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였음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명예가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한 사람과 그렇게 못한 사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172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시간과 과정, 선택, 후회, 책임, 한계를 다 경험한 후 순종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내가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서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86
[우리가 다음 세대에 반드시 전달해야 할 신앙적 가치와 내용은 무엇일까요?] 명분이나 자랑이 아니라, 실체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은 단어나 개념이나 주장이나 구호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적 성질로 증명돼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자라도 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이 시대, 이 사회에서 기독교의 가치는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말고, 우리밖에 할 수 없는 우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 내야 합니다...우리는 늘 소수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권력을 주지 않으십니다. 교회가 권력을 가지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이 외면되고 힘만 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강요되는 순간, 복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86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6:1). ‘바로잡으라’라는 것은 교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부러진 팔을 치료하고, 부목을 대고, 목에 고정하는 것, 즉 회복을 말합니다...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궁극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너’라는 것입니다. ‘너’가 남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 것은 네가 너일 때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요.
189
책임을 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거기에서, 어떤 결정을, 내가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가장으로서, 자식으로서 지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꾸 뒤로 미룹니다. 어떤 결정을 하든 겁나기 때문이지요. 답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러나 떠밀려서든 언젠가는 해야 합니다. 해서 잘되면 다 잊고, 안되면 다 뒤집어써야 합니다. 뒤집어 쓰십시오. 책임을 지라는 것은 잘못한 것을 보상하라는 것이 아니고 욕을 먹으라는 뜻입니다.
215
한 사람의 생애는 내용을 채워 가고 깨닫는 시간으로 연속됩니다. 다르기 때문에 어느 시점, 어느 경우에서 서로의 수준과 가치를 속단할 수 없습니다.
235
고민하라고 하십니다. 확인해 보라고 하십니다. 탕자를 허락하십니다. 예수 부인을 허락하시고, 팔아먹는 것을 허락하시고, 죽이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강제나 조작은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살아 보고 비교해 보고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243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정당하고 건설적인 면만 있지는 않습니다. 감정적인 거부감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욕을 잘 먹어야 합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자신의 지위와 우월감과 자존심을 그만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대꾸를 하지 말고 순하게 욕을 먹어야 합니다. 욕을 먹는 게 “알았다”는 뜻입니다...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하고 욕을 먹을 수밖에 없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245
계몽주의 이래로 논리성이라는 것은 좋은 수단인 것이 분명합니다. 논리성은 사실을 설명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만들거나 납득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논리성이 빛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257
하나님은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평범한 대화에서 일하십니다. 약속을 갈구하는 사람들, 갈증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힘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랑하는 것에 굉장한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누구를 만나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성과 본질적 이해의 회복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다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정체성과 그것이 해야 하는 기능이 혼돈되면 안 됩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258
[삶의 구체적인 고민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답을 찾아가야 할까요?]...어쨌든 견뎌야 합니다. 해답이 있어야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라, 조급한 해결을 미뤄 놓고 견디는 것입니다. 고민함으로써 생기는 마음의 긴장과 멈춤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민도 제 역할이 있습니다...정신적으로 탄탄한 맷집을 만들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뜻밖의 사건을 고민하면서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건 그야말로 ‘마술’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대신, 문제와 고민을 통해 우리를 키우십니다. 정말 희한합니다.
22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앙인으로서 의미와 사명을 확인하고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까?]...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저를 위대하게 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능력과 지혜가 생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 일하시는 방법,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답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의 초라한 자리도 감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25
인생이란 돈을 벌어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내용과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버티고 견디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세상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등의 질문에 적당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소모품과 상품을 만들거나 기계적 기능을 하는 존재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따라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인간성을 놓치지 않고 누리고 만족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28
[목사님은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목사직을 계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삶은 수동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몰리는 데로 갈 것입니다. 전혀 억울하지 않습니다...사람들의 평가를 이겨 내야 합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것은 남의 인생에 대해서 오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30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슬로건은 있으셨습니까?]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 진지하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이상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때에 맞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때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됩니다...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어진 생명에게는 기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기본적으로 어느 때든 그때에 맞으면 됩니다. 소년은 소년답고, 십 대는 십 대답고, 이십 대는 이십 대다우면 됩니다. ‘다움’이 있는 그때 현실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한다”면서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 나이보다 더 가거나 덜 가는 것에는 오차 범위가 있습니다. 그 오차 범위는 개인마다 다르지요.
35
‘욕조론’...욕조에 물을 받으려고 수도꼭지를 틀면 물기둥이 수도꼭지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지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처럼 오랫동안 쏟아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쏟아지는 물기둥은 고드름이 달리듯 서 있는 게 아니라 욕조 전체를 채우며 퍼져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물기둥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도 섭섭할 일이 아닙니다. 물기둥은 욕조를 계속 채우다가 어느 순간 욕조에 물이 넘쳐흐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서히 수위가 차오르는 하나님 은혜의 원리입니다. 젊었을 때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어떤 주제는 답을 얻어도 답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물이 차오르자 과거에 집착했던 질문들이 가라앉았습니다.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47
전 세계 종교 중에 절망이 없다고 하는 대신, 절망이 뭔가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요셉은 쇠사슬에 묶인 자리로부터 총리가 됐습니다...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배짱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억울해도, 져도 됩니다. 그것이 뭔가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보상에 집착하는 시대의 부작용은 보상을 받고도 억울함을 느낀다는 점입니다...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52
성공 시대에는 기적과 은혜가 외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내용을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콘텍스트에 금칠을 한다고 해서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격과 운명에 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정황을 바꿈으로써 기적이 있음을 보여 줬다면, 이제는 같은 정황의 사람들이 불평하고 비명을 지르는 현장에서 기쁨으로 이를 이겨 내고 있음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 교회가 다다른 길입니다...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기도하면 다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기도가 보이는 보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59
앞을 내다보고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는 일에 떠밀려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지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데 나중에 보면, 돌아보면 보입니다. 스티브잡스...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점의 연결’에 대한 얘기를 하더군요. “그땐 몰랐습니다. 되돌아보니 엮이더군요. 믿음을 갖고 사십시오. 자기 마음을 따르십시오!”...평범한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고치시고 끌어안으신 분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진리입니다...하나님은 우리한테 능력을 발휘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마음대로 해 보라고만 하세요. 괜찮다는데 우리가 스스로 떨고 있는 것이지요.
66
우리 기독교 신앙 이해에서 우리보다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고, 매일 인생과 역사를 여시고 개입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이끌고 지키신다는 것이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와 순종은 보상을 받는 조건이기보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맞는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요. 그런 증거가 되는 것이요 그런 완성체가 되는 것입니다.
87
우리는 끊임없이 인과율에 묶입니다. 이해와 안심의 문제이지요. 하나님은 자꾸 오셔서 그것을 깨십니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다음에,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꼭 손해가 아니라고 가르치시지요. 잘하고 잘못하고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이 있는 것입니다...믿음이란 인과법칙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신앙이 좋아지면 “이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제한이 됩니다. 신앙을 깨우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험과 개념을 넘어 그것을 만드시고 채우시고 완성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도됩니다.
93
언제나 옳고 유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못한 것에서도 하나님은 무언가를 하십니다. 겸손은 배워서 느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못났는지를 평생 경험해야 겸손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겸손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생기는 것입니다. 실패가 겸손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에다 겸손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창조자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111
하나님이 없으면 분노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 세상은 분노밖에 할 것이 없고, 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이 없으면 다 못되게 굽니다. 못되게 굴면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스스로 소멸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또 그것에 굴복합니다. 그것은 설득해서 고치지 못합니다. 세상은 전체가 살기 위해 법을 만들었습니다. 법이 도덕과 다른 점은 권력으로 강제한다는 점입니다...그래야 공멸과 즉멸을 면하고 사회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과 역사는 하나님이 없으면 뭐든지 다 썩게 되어 있습니다. 저놈이 나쁜 놈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가치가 형성되지를 않습니다.
119
하나님이 우리보고 오늘 하루를 견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갑니다. 내가 이 시간을 지나가면 그만큼 더 간 것입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 또한 과정입니다...간증은 자신이 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옛날 이야기를 합니다...옛날에서 현재로 돌이키는 기점을 넘어서서 그래서 지금은 무엇과 씨름하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125
문제는 무엇이 남느냐입니다. 잘하는 것에서 무엇이 남고, 못한 것에서 무엇이 남느냐인 것이지요. 거기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은혜로 남습니다. 잘했어도, 완벽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분노와 원망에 불과합니다. 실패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으면 그 잘못이 본인에게는 일생일대의 전기가 되고 교훈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몫입니다.
136
가능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 적극적인 신앙인이 되려고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자기 도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자꾸 도망을 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준비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141
우리 교회에도 간혹, 우리 교회는 이런 잘못이 없어서 정말 좋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건 자랑이 아닙니다. 남이 한 실수를 자신은 안 한다고 좋아하는 것은 부정적인 확인에 불과합니다. 자신은 자신이 한 일을 말하고 책임지면 됩니다. 자꾸 남의 일을 끌어다 자기의 정체성과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155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요구 속에 있지만 더 잘할 실력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힘들고 욕을 먹습니다. 그리고 욕을 먹고 후회를 해야 합니다. 욕을 먹고 후회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빨리 가르쳐 줘야 합니다...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루 고생하면 일주일 하라고 하고, 일주일 하면 한 달 하라고 하고, 끊임없이 같은 것을 반복하라고 합니다. 후회하고 회개하면 책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다시 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술 끊고 담배 끊은 것이 끝이 아니고 인생을 살라고 합니다.
164
먹고살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정의, 평화를 이야기할 틈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면서 ‘실패의 가치’를 알게 되지요. 실패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모조리 던져 버리도록 명합니다. ‘겉치장’ 같은 것들을 손 놓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살아 내야 되는 것입니다.
165
[이 시대 젊은이라면 누구나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성공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십니까?]...유능해지려면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누군가 특별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있는 것으로 모두에게 유익해야 합니다...”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이것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일차적 원칙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심는 대로 거두지 않지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일차적 원리를 먼저 도전으로 삼고, 거기에 기적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166
박윤선 목사님의 가치는 그 시대를 통해 봐야 하는데, 그분 시대에는 우리가 유교 유산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훌륭한 것은 개인적인 희생을 하는 것이지 않았습니까...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희생시키는 자리까지 가야 속이 편했습니다...우리 어렸을 때 교회 목사님들은 여름마다 휴가 때 기도원을 가셨습니다. 해변이나 휴양지에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부담감 때문인지 기도원에 가셨습니다...저도 가족들에게는 많은 부담을 준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 시대에는 그것이 진심이고 신앙이고 보이는 증거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당시 큰 스승으로서 보여 주신 가치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존경과 항복을 받아 냈지만 가족에게는 상처가 된 것입니다...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박윤선 목사님이 억데 되신 지위는 당 시대의 발언권을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계시가 이해보다, 인식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보수 진영에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그러나 그때 우리가 그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님은 당시의 윤리와 신앙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무조건 쫓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가가 아니라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셨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감소시키거나 증가시킬 필요가 전혀 없이 말이지요.
182
신학교 교수들은 지도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지도를 보면 내가 갈 길이 보이는 것이지, 지도가 사람을 컨베이어 벨트처럼 실어다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생명을 낳지 않고, 의를 낳지 않습니다. 율법은 길과 방향을 가르쳐 주며, 이리로 가라고 할 뿐입니다.
191
저희 때는 로이드 존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 영향이 내용만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용만 아니라 자세를 받은 것입니다...어느 날 제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폐기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어깨를 딛고 넘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분이 하신 이야기에 덧붙일 것들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후배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제 글을 읽으면, 제 뜻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그때 들은 이야기가 더 확장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3
저는 설교를 짧게 하라고 합니다. 길게 하려면 대단한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짧은 설교라는 것은 내용이 간단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짙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해야 할 본문적 설명이 주를 이루고 설명과 비유가 숨겨져야 합니다. 진주 목걸이를 꿸 줄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196
[목사님은 현 시대에 한국 교회 강단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메시지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죄 사함과 죄를 짓지 않는 문제를 넘어 구원받은 신앙인의 현실적 존재의 책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임무보다 큰 지위와 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순종시키는 법과 반복되는 일상이 가장 큰 신자의 증언이 담기는 무대요 자리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성실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위대하고 매우 재미있는 것입니다.
203
근본주의자들의 특징은 화면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막만 있을 뿐이지요. 자막에는 설명만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화면을 만들지 못하면 문화가 없습니다. 문화가 없으면 가난해집니다. 여기서 문화란 내용을 담는 그 시대의 정서와 형식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정신세계와 구체적인 현실을 가져야 합니다...생각이 아니라 현실이 먼저 가야 합니다. 현실을 보고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생각을 먼저 카피하고 현실이 뒤에 왔습니다. 경기는 없고 해설만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보니까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명분이 앞서도 한참 앞서 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실력만큼이 우리 것인데, 명분보다 실력을 끌고 올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숨통이 트이고, 삶에 대해 기대가 있고 신아에 대해서 여유가 생깁니다.
213
선배는 먼저 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후배는 선배에게 업혀 가면 됩니다. 선배가 가는 데까지, 말하자면 공짜로 가는 것이지요. 선배는 평생에 걸쳐서 간 것을 자기는 20년 만에 가는 것입니다. 선배가 길을 닦아 놓아서 쉽게 가는 것입니다. 길을 만든 사람에게 업혀 가서 더 넘어가게 만드는 것이지요.
216
교회에서는 목사에 대한 불평이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목사에게 뭔가를 실어 보내십니다. 목사를 트럭 운전수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트럭에 무엇을 실어 보내시는지 보십시오. 흉년이 든 마을에 라면을 싣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운전사가 볼품없더라도 그가 무엇을 싣고 왔는지가 더 중요하지요. 우리는 그것을 잘 분별하지 못해서 목사가 와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목사에게 무엇을 실어 보내셨는지는 다 모르는 채 말이지요.
222
배움의 자세는 기다림입니다. 어디서나 의미를 발견하고, 어디서나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해야 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가 무슨 일을 당할 때 감수할 수 있게 하시고, 거기서 유익이 있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배움의 자세입니다.
224
우리의 교리는 제한을 하자고 만든 것이 아니라 복음이 가지는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하자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그물로도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교리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어 교리화할 수 없었겠지요.
256
교회에서 헌신해 일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다음에 다가오는 어떤 고민과 갈등을 겪어 내면서 각자가 성장합니다...정체성과 인격적 성숙, 그리고 살아 낸다는 것으로 구체적인 답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각자가 가고 있는 길에서 고민하고, 한계에 부딪히고, 실패를 반복하는 ㄹ것이 자신을 만듭니다. 누구나 소원이 있지만 그 소원이 자신의 실력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시간을 주십니다. 그 시간 속에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운동이 되고, 근육이 붙고, 실력이 자라납니다. 그것이 신앙 인생입니다.
8
신앙 훈련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협박과 요구와 유혹에 직면하는 현실에서 이뤄집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무엇이든 담으실 수 있다고 증언하는 믿음이 최고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뒤에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억울한 자리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그 안에 부활을 담습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은 영광을 증언하는 최고의 자리로 삼으십니다.
12
부자를 책망하는 이유는 많은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유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27
공적 예배에서 지나치게 회개가 많은 것은 점검해 봐야 합니다. 회개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세밀하지 않습니까. 만회하려는 욕심입니다. 지난 한 주일 제대로 못 산 얘기는 그만 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후회가 되려면 더 잘 살기 위한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씻어 내기만 하고 껍질만 까서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회개와 자기 결벽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흠이 없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흙탕물에도 뒹굴 수 있도록 힘을 길러야 합니다.
39
[그렇다면 나이든 사람에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다고 보십니까?] 뒷배경으로 사는 것입니다...사진도 독사진보다야 여러 사람이 뒤에서 받쳐 줘야 주인공이 돋보이는 법이지요. 나이 든 사람은 주연 역할을 하는 이들의 뒷배경이 되어주면 됩니다.
44
생명이 있으니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고 억울함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생명은 영광도 없습니다.
81
아무리 목사라도 아이를 낳으면 죄인으로 낳습니다. 그 조건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 어떤 조건 속에 있는지는 다 무시하고 원망만 남은 것입니다.
84
‘하나님은 예수의 성육신으로 유한에다가 무한을 담으실 수 있다’입니다.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에 묶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나신 사람들은 전 인류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이고, 시간적으로도 33년밖에 안 되고, 지역적으로도 이스라엘에 불과한데 거기다가 하나님이 다 담으십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시잖습니까.
91
[믿음은 우리가 주동적으로 갖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즉 성경의 말씀에 따라 믿음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일상 속에서 늘 보는 일들 속에도 얼마나 많은 역설과 반전이 담겨 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역설과 반전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자체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주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107
세상은 권력으로 정의와 평화를 만들어야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 정의라는 것은 권력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앙인들은 이미 정의와 평화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불합리한 사회 속을 억울하게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0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큽니다. 군대 갔다 오면 어른이 됩니다. 탁 집어서 무엇을 배웠다고 할 것이 없고, 사람이 실력이 붙는 것이지요.
113
인생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구체적인 과정인 거예요. 거기서 단순한 상벌로 신앙을 쉽게 안심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123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탕자의 비유처럼 나간다고 하니까 내버려 두시는 것이지요. 원래 나간다고 하면 혼쭐을 내 주어야 합니다. 아이도 망칠 뿐만 아니라 부모로서의 책임과 권위에 금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보내십니다. 그것도 재산을 달라고 하는 자녀에게 재산까지 주어서 내보내십니다. 그것이 인생이고 역사입니다. 그리고 살아 보고 나서 이야기 하자는 것입니다...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는데 배 안에 웅크리고 있으니까 ‘바다 좀 봐라’ 하시며 꽝 차서 빠뜨리시는 것입니다...굉장한 모험입니다. 세상이 모험이요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등한 지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 믿음 등의 단어는 다른 종교에서는 덕목이요 명분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서만은 그것이 지위이지요...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존재론적 차이가 극명하게 나는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리를 대등한 지위에 놓으신 것입니다.
144
우리가 애초에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생명의 냄새, 위로의 냄새입니다. 교회에 가면 거기 생명과 용서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서는 이런 건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52
[교회가 세상의 인정과 박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요?] 교회 예산의 절반을 구제에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런 말에 넘어가지 말자는 겁니다. 그것은 구제 기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 예수 믿지 않는 사회가 인정해 줬다고 교회가 더 큰 가치를 입증하는 것입니까. 상식 선에도 못 미치는 교회는 되지 말자는 당연하고도 부끄러운 이야기이지요.
153
기독교에다 화를 내는 것은 사실 기독교를 향해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답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을 알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는 답은 설명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173
단순 교육자는 정보와 명분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한편 스승은 본질이 달라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아, 인간이란 저런 것이구나’ 깨닫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181
아볼로가 뭐고 바울은 뭡니까. 바울이나 아볼로를 따라다닐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찾아오신 그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길거리에 있는 교통표지판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어디를 가는 것인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지, 그 표지판에 앉아서 굶어 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85
[설교자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시대상이 없으면 그 사람의 존재, 질문과 고민이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덕이나 명분을 논할 때는 시간성이 없습니다...설교는 은사인 것입니다. 그 말 속에 설교는 기술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매력과 능력인 것입니다. 밤낮 본문을 바꿔 가면서 내용 전체가 결국 하나님 편을 드는 것입니다. 신앙을 치켜 세우는 것이지요...같은 소리를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다시 올라가서 다시 진지해지고, 다시 불을 뿜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98
오늘날 교회는 모든 것을 함으로써 모든 것을 못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221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가르치십니까?]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을 주면 다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시간을 주면 돌아오게 되어 있지만 시간이 다하기 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시간들이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시간 속에 있는 우리가 그 시간을 헛되게 보내시면 안되지요.
232
교인들이 오지 않을까 봐 겁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지 말라고 해 보십시오. (웃음) 죄의 부담으로 교회를 떠나고, 죄에 대한 실망으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돌이킬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계속 불평할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도 갈 것입니다. 여기저기 철새 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 시간들이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어딘가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좋은 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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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그 위협이 장애물이 아니라 도전과 각성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흙이 씨를 삼켰다고 생각하는 그 속에서 씨가 싹이 되어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싹이 나는 것도 모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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