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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추적에 의하면 요셉이 갇혔던 당시의 애굽에 있는 감옥들은 지하토굴이었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벤허’라는 영화...일년 내내 햇빛 한 번 안 들어 오는 곳에...음식만 넣어주는 것으로 끝인 곳...요셉은 그런 곳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방마다 차단되어 있으며 그는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이겨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는 훨씬 울부짖고 아우성을 쳤을 것입니다. 그 힌트가 있습니다. 시편 105:18을 보십시오. “그 발이 차꼬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이 성구에서 ‘몸’...히브리 원어로 ‘혼’이라는 뜻입니다. 곧 ‘몸’이 쇠사슬에 매어 있는 게 아니라 그의 ‘혼’이 쇠사슬에 매인 것입니다...직역을 한다면 “쇠사슬이 혼을 꿰뚫었다”입니다. 소는 코만 꿰어 놔도 꼼짝을 못합니다. 어린아이에게도 끌려갑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손에 끌려가는가 하면 고삐를 ‘혼에다 맨다’라고 성서는 진술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훈련하시는가 하면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서 할 수 없이 훈련받게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냥 순순히 받지 않습니다. 도장 가게에 가서 도장 파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도장 파기 위해서 맨 처음 하는 일은 파야할 도장을 가장 확실하게 묶어 놓는 일입니다. 조각칼로 조각을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는가 하면 더 이상 꼼짝달싹할 수 없는 곳에 몰려야만 훈련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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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제가 신앙에 대해 철이 들자 저를 가장 절망케 한 인물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나는 왜 이런 믿음과 결심이 없는가?”...어느 날 야곱의 얍복나루 사건이 그가 하나님께 매달린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A.W.Pink는 ‘Comfort ye Christians’라는 책에서 요셉의 꿈을 그의 Vision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하지 않았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열심히 만들어내신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드디어 감격과 항복을 외쳤습니다. 저 같은 것도 ‘하나님의 열심’이 이 위대한 반열에 서게 하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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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아브라함)는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그를 거기까지 인도해 오시고 강권하시고 ‘목덜미를 쥐고’ 끌고 오신 것입니다...하나님이 만일 우리의 손을 붙잡고 왔으면 틀림없이 우리도 밤중에 몽키 스패너로 손목의 나사를 빼놓고 어디로 도망갔을 것이고, 발을 붙잡고 오셨으면 다리를 빼서 매어 놓고 도망갔을 것입니다. 어떻게 붙잡혀 왔든지 간에 우리는 도망갔을 것입니다. 목덜미를 붙잡혀서 올 떄도 우리는 얼마나 안 가겠다고 버텼는지 모릅니다. 버티고 발버둥치느라고 손톱이 다 빠지고 피부가 성한 데가 없을 정도였지 않습니까! 제 발로 온 것이 아니라 질질 끌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끌려왔기에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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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서울을 떠난 부산행 열차를 탄 후, 그때부터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안절부절하면서 “어디까지 왔나?”하고 창밖만 쳐다보고, 또 보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냥 시계만 보면 됩니다. “어디쯤 왔겠구나.” 시간만 보면 뻔하지 않습니까? 좀더 여유 있으면 가는 동안 책을 읽는다든가 딴 일을 하면 됩니다.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손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부산행 열차에서 좌석의 배열에 따라 평양 방향을 보고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연히 걱정을 합니다. “나는 평양을 보고 앉았으니 평양으로 가면 어떡하지?”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모두가 부산을 가는데 나만 신의주로 가는구나!’하면서 슬퍼하고 애통해 하지 말기 바랍니다...”멍멍이는 짖어도 경부선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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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신앙생활 중에서 언제나 제일 어려운 유혹은 나로부터 말미암는 힘과 원인을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좌절하면 십자가가 맥이 없어지고, 내가 실패하면 하나님이 실패하는 것 같은 감정이 우리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께 요청하지 않았을 때, 이미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완성하시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구원 얻은 자로서 완성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실패하고 실수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쪼개 놓은 제물 사이를 우리보고 걸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걸으셨습니다. “나는 천국 못가요”하고 전봇대를 붙납고 전깃줄로 몸을 붙들어 매고 있어도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들을 전봇대에 묻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굴삭기로 전봇대가 박힌 땅을 떠가지고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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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조심해야 할 것은 성서에서 가나안을 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는데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한 일은 평화를 누린 것이 아니라 전쟁이었다는 점입니다. 들어가면서부터 전쟁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처음해야 할 일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아이성의 싸움을 해야되는 전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육체와의 전쟁이 있습니다. 원래 점거하고 살고 있던 이 육신을 몰아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구습을 좇는 자들을 몰아내는 전쟁이 있어야 됩니다. 그 전쟁을 해야 되는데 누가 하는가 하면 성령께서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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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내놓아라”고 할 때, “네!”하고 순종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토록 대단한 분인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상상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사건의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 강요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족시키시는 분이시며, 너무나 만족해 더 내어놓을 것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경지까지 끌고 가실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고도 우리의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넘쳐나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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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성서에서 진술하는 것은 야곱을 하나님이 택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놓아기르지 않고 간섭해서 기른다’는 것이지 야곱이 에서보다 나아서 하나님이 야곱을 택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을 택했기 때문에 그에게 그의 인생을 맡기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목적을 둔 시작’을 하셨다는 것이 바로 ‘택함’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인생은 그의 인생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꾸 간섭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끌고 오시려고 하는 것이 야곱의 인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야곱의 불순종 간에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그러나 에서에겐 그것이 없습니다. 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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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가는 길에 이제 얼마나 얻어 맞으면서 가는가, 칭찬을 받으면서 가는가 하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말을 안 들으면 한 대 더 맞고 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택했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운명이 우리들의 손이나 어느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착하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작하신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도 않고 방해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할 일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구원을 이뤄야 합니다...우리는 실수합니다. 마음 놓고 실수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수를 한 다음에 언제든지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실수를 안 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우리가 못하니까 실수한 횟수보다 돌이킨 횟수가 더 많으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의외의 신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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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말로 하시지 왜 꼭 아프게 해야 되고, 아픈 일이 벌어진 후에 울면서 돌아오게 하십니까?’...이 부분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될 것은 하나님이 인간(우리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서적으로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능력’이고 ‘수준’입니다. 사랑이란 정열도 아니고 욕심도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높습니다...그 수준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나도 사랑을 받아내겠다는 수준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굴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굴복을 요구하는 것은 강도나 하는 일입니다. 권총을 꺼내놓고, “나랑 결혼하면 권총을 거둘 것이고 안 하면 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도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이 위협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인격적 수준의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나를 사랑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구약의 율법과 형벌의 차원에서 우리를 이쪽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철망을 쳐서 오직 한 길만을 뚫어놓고 이길 이외의 길을 가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어놓고 가고 싶은 데로 다 가게 해놓고 싸우는 ‘사랑의 자존심’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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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돈을 찾아가는 자에게 돈이 무엇인가를, 그에게 더 이상의 날이 없기 전에 보여주십니다. 자기 건강을 믿고 사는 사람에게 건강이 무엇인가를 빨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것들이 영원히 내가 의지하고 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빨리 포기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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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내가 네 인생의 주인이요 너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다. 네 인생과 네 목숨마저도 네 것이 아니다.” 바로 이 확인을 위해 오셔서 씨름을 하신 것입니다...전 생애를 통해서 바로 그런 사실을 설명했는데도 그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간섭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를 때리고 가려고 하십니다. 그러자 드디어 야곱이 알아듣습니다. 그리고는 축복을 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이러한 문제를 확실히 야곱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 하는 질문이 다른 것도 아니고 ‘이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기꾼이요, 약탈자요, 강도라는 뜻입니다...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자이지만 그러나 한번도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의 인생이 만들어지도록 요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자기의 힘으로 빼앗고 만들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그것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축복해 달라’는 것은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강도가 왜 달라고 그러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굉장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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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씨름을 하시고 환도뼈를 부러뜨리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십시오. 그것은 심판도 아니고, 포기도 아니고 분노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고집쟁이는 야곱입니다. 성서에는 야곱만한 고집쟁이는 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야곱을 항복시키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야곱을 항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십시오...하나님께서는 항복할 때까지 하십니다...그 큰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신 일입니다...그의 그 지독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어코 하시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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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구원이란 죽을 자리에 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축복의 자리로 옮겨 놓으시는 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구원이란 훨씬 더 기묘하고 신비합니다. 길을 가다가 모닥불 속에서 타고 있는 나무를 본 조각가가 “내가 저 나무로 거북선을 조각하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맨 처음 하는 일은 타고 있는 나무를 꺼내서 불부터 끄는 것입니다. 다 타고 난 재로 거북선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먼저 꺼내야 합니다. 꺼낸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꺼냈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나무 자신은 참 신이 날 것입니다. “만세! 나 구원 얻었네. 나는 영벌의 자리에서부터 나왔네. 나는 이제 더 불에 탈 일이 없다네. 이제부터는 저 모닥불에 들어가서 다른 나무를 꺼내어 오리라.” 그러나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 정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꺼낸 것’은 조각품을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꺼낸 것’은 목적을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무쪽에서 보면 불탄 것보다 꺼내놓는 게 더 괴롭습니다...꺼냈기 때문에 매일 조각 도구로 파이는 일을 당합니다. 톱으려 켜고, 끌로 홈을 파고, 대패로 밀어내고, 후후 불고, 갈고, 사포로 문지르고..., 이것은 불에 타는 것만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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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아들로 만든다’라는 것은 아들을 낳아 둔 것으로 아들이 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란 낳은 것이 끝이 아니라 낳은 것이 시작입니다. 거기서부터 드디어 부모의 수준이 나타납니다...’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우리는 거기까지 훈련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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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나에게 아들이 있는데 저 아래에 사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고 와서 함께 놀았습니다. 놀다가 텔레비전을 망가뜨렸습니다. 누가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아래 집에 사는 애가 망가뜨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 어디 사니?” “저 아래 살아요” “그래? 같이 가 보자.” 손잡고 가서 그 아이의 부모에게, “수선비 40만원 되겠습니다.”그럴 것입니다. 왜 남의 집 아이에게 야단치고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내 아들이 깼으면 “이 T.V. ‘40만원’이란다.” 이렇게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저 방구석에서 손들고 5일 동안 서 있어.” 그런데 자녀입장에서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손들고 서 있으면서 한 사흘쯤 지나면, “이 사람이 정말 내 아버지 맞아? 옆집 애가 깼다고 하니까 다정스럽게 웃으면서 ‘얘, 너희 집이 어디니?’ 하더니 내가 깼다니까 인상을 있는 데로 쓰면서 닷새 동안 벌 서 있으래!” 이것이 우리가 겪는 신앙의 가장 큰 혼돈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데 ‘왜 나에게 어려운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점입니다...저 쪽은 끝나면 몽땅 한꺼번에 받습니다. 그러니까 놔두는 것입니다...게거품을 내뿜든지, 물구나무를 서든지...여기는 내 아들입니다...고칠 때까지 채찍질을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얼마나 고집이 센가하면 그의 별명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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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사람은 누구나 ‘정당한 소원을 가지지 않더라’는 것을 성서가 지적합니다. 그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다윗의 밧세바 사건으로 ‘사건화’하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사도 바우링 로마서에서 논리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인간이 누구냐’하는데 대하여 다윗이 드디어 깨닫습니다. 인간에게서 선이 나올 수 없고, 그가 가장 선한 차원에서 만드는 것마저도 죄라는 사실을 압니다...’인간이 누구냐’하는데 대하여 다윗이 드디어 깨닫습니다. 인간에게서 선이 나올 수 없고, 그가 가장 선한 차원에서 만드는 것마저도 죄라는 사실을 압니다...그가 가지고 있는 죄는 지금의 실수가 아니라 그가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 부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라는 것을 이런 개념에서 정의합니다. 인간이 가장 선한 일을 행한 것도 죄입니다. 인간이 가진 도덕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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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마태복음 11:2가 이 결론을 내립니다.”...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꺠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세례 요한도 헛갈렸습니다. 그 일 하나 때문에 태어났는데 그 요한이 헛갈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헛갈리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이 볼 때 메시야란 와서 모든 악을 없애고, 나쁜 놈들을 다 밟고, 심판을 명하고 모두 쓸어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킬 백마타고 오시는 거룩한 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와서 딴 짓만 하시니까 세례 요한이 듣다, 듣다 못해서 제자들을 보내어서 그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사탄의 권세로부터 내가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다.” 무슨 권세로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이 땅의 권세 잡은 자의 권세를 쳐들어가고 있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야가 그러면 그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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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여기 있는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 베드로만큼은 주를 좇겠나이다”...이는 절대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렇게 각오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안 되더라’는 말입니다...베드로가 이제 배우는 것은 그가 가진 자신과 그가 가진 결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내가 결심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결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거십니다...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자신이 할 일이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배웁니다....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요 헌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내가 ㅚ선을 다해도 안되니까 ‘난 개판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를 사랑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근본적인 자세의 차이가 납니다...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유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제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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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우리의 기준은 옳고 그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성서에 거짓말이 두 번 나오는데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애굽 전역의 산파들...”산모들이 모두 건강해서 아기를 받으려고 달려가 보면 이미 다 낳아 놓았으니 어떻게 합니까?” 산파들이 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 거짓말을 한 산파들을 하나님께서 참으로 칭찬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리고성에 살던 라합입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스파이(정탐꾼) 둘을 감춰 놓고...라합이 구원을 얻었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대단한 축복입니다...거짓말이란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반대 편에 서는 것입니다. 사탄을 가리켜서 그는 처음 거짓말을 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 반대편에 서는 것이 거짓입니다. 사실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만이 거짓이 아닙니다...”아버님은 아직도 50년은 더 사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효도라고 그러지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너무나 법조문적으로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를 따지는 어리석은 짓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끊임업싱 물어야 합니다...사랑한다는 말은 ‘옳은가, 틀린가?’라는 것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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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주께서 주신 명령은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우리가 하는 신앙 행위와 신앙의 열심이 하나님에게 이익이 되고, 이웃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행세했어도 다 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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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우리는 고집을 부려 보았자 80년인데 하나님은 영원토록 부리십니다. 그의 고집이 얼마나 강한지를 로마서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우리의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이보다 무서운 말씀은 없습니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고집하신 것을 보고 우리는 빨리 항복해야 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아들을 죽이기까지 고집을 피울 수 없습니다...얼마나 더 얻어맞고 오느냐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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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갈등은 이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있는가? 내가 이꼴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실 리가 없지! 내가 이 꼴로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남에게 해도 좋단 말인가?” 이런 질문의 뒤에 있는 가장 큰 불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축복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법이다’라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우리 모두에게는 구원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이 자리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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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믿습니다. 믿습니다.” 톤을 높이고 박자를 맞춰서 ‘믿는다’고 깡충깡충 뛰면 마음속에 믿음을 의지하는 강한 신앙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자기 최면’일 뿐입니다...믿음은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자들입니다. 설득 당하는 것 중에 맨 나중에 설득당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이해’부터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부터 설득하고, 인생을 설득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설득당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우리들의 운명이 하나님 안에 설득당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우리들의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생에서 하나님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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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신앙생활 가운데 스스로의 신앙생활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란생활’과 ‘애굽생활’을 허락하시고, 가야 되지 않을 곳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틀림없이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그 수준에 이르지 않은 사람에게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되지 않은 것을 미리 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되도록 하신 후에 달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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